2021년 3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이 증언한 내용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증언한 것인지 왜 중요한 것일까요? 증언으로 말미암아 새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창세기 1장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기술하는 날짜별 형식마저도 창세기 1장을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29a]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
이튿날이라는 것 또한 창세기 1장처럼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며 요한이 증언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도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1~3일에는 틀을 만드시고, 4~6일은 내용을 채우십니다. 틀이 없고 내용이 없는 창조 전 상태에서 6일 동안 구체적 과정을 통해 틀과 내용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빛을 만드시고, 궁창을 만드시고, 바다와 땅을 나누신 것이 틀을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별을 만드시고, 바다에는 물고기를, 인간을 만드신 것이 내용을 채우신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새 창조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새로운 틀을 만들고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을 채우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래서 먼저 사람들이 위대하신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 첫째 날 일어난 것이고, 그 분이 누구인가 증거한 것이 둘째 날 일어난 것이며, 35절이 셋째 날 일어났던 것입니다. 셋째 날에는 직접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혼돈한 자에게 틀이 생겨서 생명이 담길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틀이 세워지자 그 다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하나님이 만드신 틀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증거한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채움을 받는 것이 새 창조입니다. 이것이 완성되면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창세기에서 안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안식은 온전한 연합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안식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요 2:1)
사흘 째 되는 날, 바로 안식하는 그 날, 혼인잔치로 안식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날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만드셔서 하나님이 기쁨을 채우시고 하나님과 땅의 성도들이 연합하는 자리를 안식이며, 충만한 자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식으로 가는 첫 번째 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그 증언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증언하였나요?
1. 예수님을 통해서만 속죄가 가능함을 증언했습니다.
[29b]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인가요? 양은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눈도 어둡고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강한 존재가 와서 공격하면 무기력하게 당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은 더욱 무력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어린양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냥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 22:8)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받치고자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도 데리고 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제사를 드리는지 이삭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잡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과, 하나님은 어린양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00세에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잡아 죽인다고 생각해봅시다. 요즘처럼 말도 안 되는 패륜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아닌 정상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일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시는가 아브라함은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루셨는지를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유월절에도 어린 양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출 12:21)
여기서 유월절에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릅니다. 그리고 피를 바른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모두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속의 피를 바른 자들만 살아나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에게 양을 데리고 가 양을 죽여서 죄인이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은 속건제의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레 14:24)
구약성경에서는 자주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죄를 씻기 위해 양을 가져와서 죽였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짐승을 죽이고 살을 발라내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신학 대학원을 다닐 때 성막 세미나를 들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구약의 성막 시스템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막 지역에 가서 양을 잡아서 죽이면서 제사장이 했던 일을 했던 것을 비디오로 찍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양을 어느 집사님이 끌고 오고, 양에게 머리를 안수를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더니 제사장 옷을 입은 사람이 칼을 찔러서 양을 죽이자 피가 튀자, 양을 가져온 집사님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양은 크게 울지도 않았습니다. 작게 메 하더니 죽었습니다. 그런데 피가 솟구쳐 양이 죽고 있고, 그 앞에서 엉엉 울며 땅에 앉아있는 집사님을 바라보며, 죄를 지은 사람이 다시 죄를 짓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십자가를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각인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시청각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죽음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양을 죽임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을 대가로 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죄가 다른 생명을 바쳐야지만 하는 죄가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동일합니다.
도둑질은 1년, 강도는 3년, 누구를 죽여도 술 마셨다고 하면 몇 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대가로만 죄가 사해지는 것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모든 죄는 죽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하나님을 반역한 죄이고, 대가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왕을 반역한 자들은 엄청난 벌을 받았습니다. 잘못한 사람의 먼 친척에 불과한데 같이 잡혀가서 50명, 100명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형벌입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죄의 경중을 파악한 다음에 어떤 것은 나쁜 죄, 어떤 것은 덜 나쁘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에서 죄가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이 죄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온 사람이라는 것이 생일이 빠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보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여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을 받아들여야 새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한 자가, 나를 대신하여 죽은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 깨닫고 영적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돈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나쁜 일인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얼마나 심각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삶입니다. 세례요한조차도, 인간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이 그를 알아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업적으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조차도 내가 그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위대하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존재로 생각되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짠하고 나타나셔서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신 가장 큰 목적이 근원의 죄를 해결해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일생 내내 노력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살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 살 쪘을 때는 결혼하면 다 찌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지면서 살을 빼기 위한 노력을 20년간 지속하였습니다. 예전에 한의원에 갔더니 60대의 진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살을 뺐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쪘습니다. 살을 뺄 때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찌는 것은 너무 쉬웠습니다. 기도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저의 생활습관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운동도 안하고 맨날 초콜릿을 먹고 달고 짜고 매운 것을 먹었기 때문에 살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면서 그래도 많이 변했습니다. 30대에는 움직이기만 해도 아팠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운동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게으름에서 벗어나고자 애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버려 남편과 아이가 완전히 바뀐다면, 이런 일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천사로 변했는데 나는 안 변하면 나만 악마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어 온전히 탁월하다면 그를 주변 사람들이 괴롭혀도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도 그렇게 힘들게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직 완전히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 풍성함이 바다와 같이 가득하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그에게 아무리 상처를 주고 미워하더라도 대단히 어렵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민감한, 갈등을 하게 하시는 이유가 그 사람을 먼저 성장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먼저 성장하고 성숙한 은혜를 나누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결과입니다.
죽은 다음에 새 하늘 새 땅에 가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새 하늘, 새 땅의 결과를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이전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할 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용납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죄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는 새 창조가 저지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서만 새 창조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그 사람과 매일 같지는 않더라도 문득문득 연합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불평이 가득하고 분노가 가득한 존재인데, 예수님의 능력을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성령으로 살리시는 하나님임을 증언했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살아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 또 다른 중요한 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야말로 죄가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비둘기가 하늘에서 내리듯이 성령이 내렸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둘기가 순수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기도를 하면 눈에 보이는 성령이 임한다고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생하게 메시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물에 들어가 죽었는데 새로 태어난 자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창 8:11)
노아의 홍수사건이 어떤 사건인가요? 인간이 모두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받은 사건입니다. 은혜를 받은 한 가족만이 살아납니다. 방주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처음에는 그냥 돌아오지만 두 번째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옵니다. 이 비둘기는 죽음 가운데 임한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람나무는 올리브, 기름 즉,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에 들어가셔서 죽으시고 올라오시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이전에 세례를 받으셨는데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례를 받을 수 있겠어?라고 물어보십니다. 십자가에서 물로 말미암아 죽음의 심판이 임하시는 것처럼 그가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도 노아의 방주도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예수님의 육체는 죽으셨지만 성령에 의해서 그가 살아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례를 받는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성도는 어떤 자인가요?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으로 태어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죄된 육신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예수님과 함께 태어나는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십자가의 사건이 너무나도 관념적이고 너무나도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죽는 자리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울 수 없습니다. 옛사람은 우리 존재보다 너무 강력합니다. 우리를 그냥 놔두면 우리가 그저 맛있는 거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며 나를 하나님처럼 만들 수 있는 자리로 달려가게 됩니다. 이전에는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고 이야기하면 그냥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청소년기에는 아이들이 보통 그러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부모가 이야기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청소년의 뇌를 학자들은 그래서 파충류의 뇌라고 이야기합니다. 포유류 정도는 되어야 옳고 그름을 보고 판단하는데, 청소년 시기에는 도마뱀처럼 자기 맘대로 합니다. 그래서 청소년시기의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도마뱀을 집에서 키우는구나 생각하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옛사람이 가득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말씀해주셔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성령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이 말씀의 은혜와 기도를 통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본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영적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서서히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나아갈 때, 탁월하게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살아있을 때 예수님의 모습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문득문득 나타나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큰 문제는 문득 문득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 나타나도 좋은데 1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지칠까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라고 생각할 때가 예수님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내가 맞아. 내 주변 사람은 다 틀렸어.”라고 하며 좌절하고, 분노하며 주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노릇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정해놓고 주변사람들이 다 내 마음대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분노하는 이유도 내가 하나님 노릇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지배하는 힘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살아있는 모습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헌신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을 맛봐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위대한 사람이 그랬다더라, 바울이 그랬다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때마다 예수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잠깐 대화를 해도 위로가 되고 잠깐 대화를 하는 것이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깐 맛보는 하나님 나라의 맛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입니다. 하늘사랑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이 가족을 넘어 우리들 안에서 누려져서 결국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