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문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종교적인 사람이 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예수님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좋고 나쁨은 그 사람이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결혼 생활과 신앙생활은 많은 점에서 유사합니다. 결혼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오래되었다고 관계가 다 좋은가요? 기간과 행복도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행복한 사람도 있고 오래되서 행복한 부부도 있습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이것 역시 신앙과 유사합니다. 관계가 좋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합니다. 연애 때의 관계가 결혼해서 새롭게 발전하지 않으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감격으로 뜨거울 수 있고 말씀 배우는 것이 기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새로운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처음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점점 변화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새로운 분으로 인식하며 관계가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나요?
1. 선생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세례요한은 당시에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관심을 받던 사람입니다. 고대에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어떤 사람이 유명해졌을 때, 그 사람을 따르는 많은 제자가 몰려들었습니다.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성경을 잘 가르치는 랍비의 경우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스승을 따라 파가 나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 밑에도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합니다.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로 이 분이 그 분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기 원했던 것은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20] 요한이 …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이들은 아마 많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였나요?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그 분이 오시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자마자 제자 둘이 어떻게 하였나요?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당연한 일입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서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왔던 이유도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 안드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가 요한이라고 어떻게 추측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처음 예수를 만난 장면을 묘사한 것을 보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그 두 제자 중 한 명일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추측합니다. 이들이 예수를 따르자,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38a]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
쉬운 말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일반적이라면 자신이 온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38b] …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님은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선생님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을 합니다. 왜 이렇게 대답한 것일까요? 이들의 열망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거하시는 그곳에 찾아가 왜 왔는지를 길게 이야기하고 그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한 마디로 만난 목적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생업을 버리고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온 것입니다. 옛날에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랍비의 삶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고기 잡는 일을 하면서도, 메시야를 꿈에 그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메시야라는 분을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선생님이 계신 곳이 어딘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답하셨나요?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이 머무는 곳을 알려주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만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 그들의 형제들도 한 명 한 명 첫 만남을 가졌을 것입니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안드레의 형제인 베드로가 원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이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에 예수님과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적었기에, 랍비라는 단어를 선생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선생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선생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삶 전체를 바치는 사람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선생과 제자로 시작한 이 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랍비라고 부르며 그에게 원했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삶의 지식이든, 말씀이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식을 인생 자체를 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비라는 사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기에, 그 지식을 가지면 랍비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제자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지식을 얻고자 예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인생에서 실패하고 힘든 이유가 특별한 지식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 따른 특별한 지식을 알려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그러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처음 다니다 보면 그것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처음 와 많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 관계가 머물러있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나요? 모든 정보, 모든 경험은 반드시 지루해지게 되어 있고 금방 더 새로운 것이 필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첫 만남이 제일 좋을 수 있습니다.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고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식을 제시하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금방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지루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따분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은 쉽게 예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해결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면 괜찮은데, 교만해져서 엄청나게 비판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서, 이것저것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고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닌, 교회 다니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교회와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끊임없는 뒷말, 비난과 서로를 향한 정죄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밖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경우,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비판보다 더 악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대학에서 어떤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업을 듣기 시작하였는데, 교수님이 성경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성경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많이 아셨습니다. 그런데 지식을 해석하는 방식이 삐딱하였습니다. 아직도 성경을 믿는 미개한 사람들이 많다고 수업 중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한적이 없고, 그분은 인간다운 인간을 보여주는 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학기 내내 정말 힘들었습니다. 기말고사가 돼서 레포트를 써야 하는데, 교수님이 쓴 책을 펼쳤더니, 이분이 학부는 종교학은 하셨는데 석사를 신학을 한 것입니다. 그제야 신학교를 다녀서 성경을 잘 아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교까지 가서 성경에 대해 배웠는데 지식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보니 더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선 것입니다. 레포트에 저는 저의 생각을 잔뜩 썼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레포트를 읽을까 했는데, 그 과목이 그 대학에서 받은 성적 중에 가장 낮은 성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지금 교회에 다니며 새로운 지식이 없으면 지루해지는 관계에 있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보셔야 합니다. 다음 단계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지루한 관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의 단계에 머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욕망의 해결자로 관계를 맺습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왜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고 하는 것일까요?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a]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
안드레가 자신의 형을 찾아 메시야를 찾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먼저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마침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없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안드레가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42b] …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라는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그가 베드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만나자마자,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자 마자 시몬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본질을 꿰뚫어보시고 영적인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볼 때, 바위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듬직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상황과 상관없이 본질을 꿰뚫어보시고 이름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가장 좋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그의 본질을 꿰뚫어보시고 진짜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메시야와 구원받는 자의 놀라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만남 이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의 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열망하던 메시야는 엄청나게 힘이 강해야 했습니다. 군사력, 경제력이 강해야 했습니다. 다윗처럼 무력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백성에게 풍요를 가져다 줄 지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목수이신 예수님을 보며 낙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을 구원할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의 해결자로 보았을 때 얻게 되는 대부분의 결론입니다. 이런 사상을 민속 메시야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기복주의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병이 낫고, 삶과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실망하는 날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뜻대로 개입하지 않으시기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열망을 한다면 탐욕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를 알게 해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신이 주인공에게 하나님 역할을 맡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다 듣다 보니 하루에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한꺼번에 예스라고 하자, 난리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요구하는 욕망을 이루어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들어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 앞에 저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간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미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택한 자들을 새로운 단계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나의 욕망을 이루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하지만 택함을 받은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눅 5:3)
베드로, 요한, 안드레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기를 잡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베드로의 배를 콕 찝으십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써야겠다고 오신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요?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4-6)
그때, 무엇이라고 대답하나요? 처음 보았으면, 말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믿음이라고 하지만, 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적이 있기에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목수로서 고기를 잡는 것을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에 불편하게 관계를 끝냈기 때문에 베드로는 순종한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베드로는 갑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자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아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면 맞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병들어도, 하나님은 때로는 그 과정을 지나게 하시는 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원하는 모습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어주지 않으시면 베드로처럼 반응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의 인생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내가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무너뜨리시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은 언제 찾아오셨나요? 건강이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자기가 자랑하는 영역일수록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안다고 했지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찾아오셔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인도해나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다고 고백되는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이 일이 쉬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메시야라고 믿었지만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자시 실망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이전에 똑같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똑같이 나타나십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6)
그런데 이번에는 베드로가 다르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서 그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 21:7)
얼마나 급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배가 정착하기 전에 뛰어 내려 예수님께 옵니다. 자신의 입으로 부인을 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십니다. 사랑의 관계를 베드로에게 회복시켜주십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a)
예수님은 일부러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할 정도로 약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만 입으로 부인하진 않지만 내 말과 내 삶으로 부인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이끌어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예수님께 그 분을 하나님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의 관계로 행복한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런 특별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열망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