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여러 과정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믿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을 얻게 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나요?
1.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소개하거나, 예수님이 직접 제자로 부르셔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원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빌립이나 마태는 예수님이 직접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빌립 같은 경우에는 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과 나다나엘은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에 능통했고 구약이 예언하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부르심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인 나다나엘까지 한 번에 제자로 부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트에 가면 있는 원 플러스 원의 경우입니다. 빌립 한 사람을 불렀더니 나다나엘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특히,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은 이 본문 외에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특별한 일을 한 것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바돌로매라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바돌로매는 이름이 아니라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나다나엘이 그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의 명단에는 있지만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업적이나 말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통해 오히려 저와 같은 사람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베드로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행동파, 열심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행동주의적인 사람이나 열심을 가진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나다나엘처럼 조용하고 깊은 사색을 하는 사람도 제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맞는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다양한 사람으로 채워 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이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보고 나니, 구약성경이 예언하던 그 분이라는 사실에 흥분하여 나다나엘을 전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회의적으로 반응합니다.
[46a]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빌립이나 나다나엘 모두 나사렛 근처 동네 사람입니다. 그들은 나사렛이라는 낙후된 동네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곳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골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서 나라를 구원하고 역사를 바꿀 메시야가 났다고 하니까 나다나엘은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 그 사실을 확인한 뒤에 확신에 차 나다나엘을 초대합니다.
[46b] …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빌립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다른 사람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것일까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나다나엘은 예외였던 것일까요? 이것은 도덕적 특성이나, 성숙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와 간사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을 이름이 변화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간사한이라는 단어는 창세기에 나옵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 27:35)
여기서 ‘속여’라는 단어가 ‘간사한’이란 같은 단어입니다. 야곱의 전형적인 성향은 속임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노력하는 인간의 일반적 특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이익이 되는 한에서는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입니다. 조금은 착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많아 이렇게 이기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결국 착하다는 것도 자기 이익을 위해 착한 것입니다. 내가 당장 손해보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간교한, 속이는 모습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인생 가운데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변화를 이름이 바뀌는 것으로 보여주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이름이 바뀝니다. 그렇다고 야곱을 더 이상 야곱으로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성경도 병행하여 이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명명해주셨지만, 야곱적 본성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믿음의 반응을 하면 이스라엘로 명명하고 그렇지 않으면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무엇인가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고 되어있지만, 원어로 번역하면 하나님과 겨루었고, 사람들에게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배경이 무엇일까요? 천사가 야곱과 씨름하였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사실, 야곱이 졌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었는데,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뜻 자체는 엘이라는 ‘하나님’이 붙어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셨는데 왜 사람에게 이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기셨을 때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는 승리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삶에 온전히 나타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승리를 소유하게 된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비굴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7번 형을 향해 절하고, 형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셔야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에게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야곱의 모습을 벗어나 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메시야에 대한 열망을 간절하게 가지고 있음으로 어떤 고난을 겪고 살았는지를 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왜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열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로마가 지배하고 평민들의 삶이 피폐한 나라에서 고통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메시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열망과 자신의 모든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가 무효가 된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열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주셔야 가능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의 모습 가운데 절망적 상황이 나의 열심히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한 자의 태도가 참 이스라엘로 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큰 착각입니다. 개개인의 운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심각한 영적 위기 가운데 서 있습니다. 코로나로 닥치는 위기의 전조가 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한국에 교회가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처한 영적 상황입니다. 한 개인이 노력하면 되는 문제인가요?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을 받게 됩니다. 무조건 세상과 차단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갈구할 다음세대가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한 교회가 열심을 다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가 얼마나 있나요? 자녀 세대를 향한 영적 유전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난 없이는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간구해야 합니다. 평안하고 갖추어진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도 열망을 가지게 된 것은 시대적 고통을 다 껴안으며 하나님께 해결책을 놓고 울부짖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이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에 나다나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음을 보았는데, 어떻게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 메시야를 보내달라는 간구였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당시 사람들이 묵상하고 기도하던 장소입니다. 나다나엘은 절망이 컸기 때문에 메시야에 대한 열망이 컸던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분노로 절망에 대해 반응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약속을 붙들며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깊은 간구와 절망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고난을 지날 때,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으로 느끼길 원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과 신비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내가 몸부림쳐서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적 구원은 우리 인생의 근원적 부분은 생명을 얻고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근원이 흔들리게 됩니다. 영혼이 뒤흔들리고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과 교회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한국에 임할 영적 기근의 시기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개입과 은혜를 사모하는 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2. 하늘을 열어 성령을 주십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복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떤 더 큰 일일까요?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하며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메시야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들, 큰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고 말하십니다.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큰 일, 놀라운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 말씀도 구약에서 야곱의 과정 가운데 나타났던 에피소드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왜 야곱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축복과 은혜가 부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그 복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늘은 생명의 통로며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옛날 전통교회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할 때, 선택하는 본문의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저주를 받고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말씀하시기 위한 내용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율법과 종교 시스템이 다 무너졌기에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순종할 수 없어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막혀 복을 주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다시 하늘 문을 열어 복을 부어주시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이 복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성령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성령인데, 이것이 하늘이 열려 우리에게 내려지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사건 속에 등장합니다.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2-4)
이때, 한 번만 하늘이 열려 복이 부어지는 현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후로는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이 열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을 열린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이 오셔야 우리는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왜 부활주일을 기념하나요? 우리는 원래 죽은 자이며, 인생 내내 시체처럼 썩은 내를 풍기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미움, 분노, 파괴, 절망, 우울 등 온갖 더러운 것을 뿜어내며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착한 척 살아가지만, 영혼 안에는 더러운 욕망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함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나다나엘처럼 간교함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만이 해결해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며 갈망하며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이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에 마음이 변해, 성령 충만하여 놀라운 복을 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과정을 지나가게 됩니다. 간교함을 인정하며 내려놓는 과정이 길고 긺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해결책은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다스리시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런 간교한 마음을 내려놓고 참 이스라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길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성령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올해보다 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생명으로 흘러나가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