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구약성경이 기록된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모형을 통해 사람들이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것들이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약의 모든 것들이 실체이신 예수님을 모형하는 그림자였다고 가르칩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구약성경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음식 규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엇은 먹으면 되고 무엇은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 조차도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절기도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의 ‘몸’은 ‘실체, 본질’이라는 의미입니다. 진짜가 있으면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들이 구약에 있는 많은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형이 오랫동안 계속 되다보니, 사람들이 실체를 기대하지 않고 모형이 진짜라고 생각하며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욕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의 욕심을 부여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마저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형 중의 하나가 성전입니다. 성전은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사를 통해 죄를 씻고 하나님을 만나 거기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임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인간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변질되었고 모형과 실체를 구분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형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붙잡게 되면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모형은 실체가 오면 폐기되게 되어있습니다. 모델하우스도 진짜 아파트를 지은 후에 폐기처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 모형은 폐기되고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1. 왜곡된 성전의 모습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은 유대인의 절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유월절마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시간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예루살렘 성전이 장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죄를 씻어야 하기에 제물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너무 당연하게 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것이 처음에는 편리를 위해 시작되었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왜곡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서부터 양을 끌고 오면 얼마나 힘들까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전 주변에서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두개인들과 같은 성전 관리자에게는 돈 벌 기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허가하지 않은 짐승은 퇴짜를 맞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가까운 곳에서 목장을 운영했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이 키운 짐승만 판매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장사꾼이 필요했고 엄청난 수수료를 내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제사가 돈벌이 수단이 된 것입니다.
성전에 그렇다면 왜 돈 바꾸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유대인 남자는 일 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반 세겔은 은 5g 정도입니다. 반 세겔은 지금의 돈으로 약 이틀치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1년에 한 번, 10-20만원 정도의 성전세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들이 로마의 동전을 사용했는데, 그곳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로마 동전으로는 성전세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전 가운데 형상이 새겨지지 않은 두로 지방에서 사용하는 동전으로 성전세를 냈습니다. 이것도 사두개인들이 환전상에게 돈을 많이 받고 환전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왔지만, 엄청난 수수료를 내면서까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많이 내더라도 중요한 일을 위해 사용된 것일까요? 종교 시스템을 가지고 먹고 살던 종교 지도자, 장사꾼들의 배만을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전이 시장터가 된 것입니다.
성전은 원래 안뜰과 바깥뜰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와 기도를 하던 장소였습니다. 그곳도 성전이었던 것인데, 그곳이 시장통이 되니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시장터에 와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나요?
[15a]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
장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장사꾼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일까요? 내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확고한 권위가 그들을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예수님이 이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꾼들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지를 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5b] …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한 명이 아닙니다. 다니면서 상마다 다 뒤엎고 계신데,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정에 이끌려서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16a]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화가 날 때는 감정적이 됩니다. 화가 나면 선을 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조절이 잘 안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화를 내신 것이라면, 선을 넘어 반응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말로 말씀하십니다. 감정에 사로잡힌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낼 수 없는 예수님만이 내실 수 있는 공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 성전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에 맞게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16b]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다른 병행 본문인 복음서는 더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나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삶에서 다른 것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성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갈급함을 이용해 가치 있는 것을 빼앗는 장사꾼들의 행동이 강도짓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일을 하실 것을 구약은 미리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 그 날이 오면 만군의 여호와의 성전에 다시는 상인들이 없을 것이다.”(슥 14:21)
쉬운 성경으로 읽은 이유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상인이 가나안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이라는 자체가 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남의 이윤을 뜯어 먹는 그 날이 없어지는 그 때, 온전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할 때가 올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욕망을 공격하자 사람들은 결국 이 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마저 죽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한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 안에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이 생겨야 합니다. 거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구원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 죄악이 가져오는 추악함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가장 큰 영향력이 욕심 즉, 탐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말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한 모든 것입니다. 부처를 섬기고 절하는 사람만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체한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가져다 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을 대신 추구할 때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강력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제가 유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 년에 수 천 만원이나 되는 비용을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공급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때, 저는 돈을 통제할 수 없기에 언제 어떻게 누가 얼마를 주실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어느덧 이 은혜가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점이 되니 돈이 채워지지 않았고 3개월 정도 너무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편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돈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니,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살아가야 하니, 믿음으로 장을 봤지만 불안해졌고 당장 먹어야 하는 음식은 먹었지만 환불이 되는 것들은 혹시 모르니 남겨두어 환불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미국에서 돈이 다 떨어져서, 한국 통장에 7만원 정도가 남아있었는데 수수료 3만원 정도를 떼고 송급을 한 적도 있습니다. 3개월쯤 되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돈 때문에 기도한 적이 없었지만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고 상황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침 아내가 미국에서 성경 공부를 하다가 리더를 하기로 했고, 정장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입을 옷이 없어서 미국의 재고 떨이를 하는 매장에 가 블라우스를 5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와 보니, 다음 날 전화 요금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통장에는 전화요금이 빠져나갈 수 없는 정도의 돈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가 자신이 산 옷을 환불하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둘이 붙잡고 엉엉 울다가 5불 때문에 결국 블라우스를 환불하였습니다. 그날 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내가 하나님께 엄청난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살 정도만 해주면 되지 않으신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무엇 때문에 요동하며 마음이 상한지를 보니, 하나님이 저에게 수백 번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것이 저의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요동하던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돈을 의존하고 있는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근원을 바꾸셔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오게 하시고자 이러한 상황을 만드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고 말씀으로 깨닫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든 상황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 날, 한국에서 어떤 집사님이 전화를 하셨고 갑자기 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몇 백 만원의 돈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전, 상황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상황을 통제하시며 진짜 중요한 영적 깨달음을 얻게 하시기 위해 개입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본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은혜의 자리로 이끌려온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주고자 하는 만족과 기쁨인 것입니다.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2. 모형 대신 진짜 성전을 보여주셨습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이런 난리가 났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 아니라, 와서 표적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혹시 메시야인가 하는 의혹이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러 표적 중 하나를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표적이 무엇인가요? 엄청난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성전을 세웠는데, 이것을 헐어버리면 삼 일 안에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 자체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죄명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마 26:61)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비방하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 27:40)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여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시의 건축물로는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인 건축물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 성전은 헤롯이 짓기 시작한 헤롯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 이후,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 침공으로 무너지자,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고 헤롯이 왕이 된 후 유대인들이 자신을 싫어하자 유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46년째 짓고 있던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고 결국 82년만에야 완공되었습니다. 이렇게 80여년이 걸쳐 지어진 성전은 7년 만에 로마의 침공으로 다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지금 성전의 벽 일부만 남아있고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공들이고 애쓴 성전이 왜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일까요? 진짜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허물고자 하신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제 예수가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고,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고 해서 진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행복은 영적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주시고자 자신이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전달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제자들도 그 당시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눈에 보이는 화려함, 성전을 의존하였기에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성전 방문을 3번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이 얼마나 멋진지 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통해 참 생명을 기대하고 누리는 사람은 삶에서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의존, 감탄, 열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불교는 끊임없이 자기의 욕망 자체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수련을 통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밥을 굶고, 절을 하며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밥을 굶고 매일 욕망을 죽이기 위해 생쌀만 먹고 살아도 우리의 욕망을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 불만족하는 이유, 관계가 깨지는 이유, 열등감에 시달리는 이유, 우울해지는 이유 모두 우리의 욕망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이 우리를 진짜 만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맛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이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입니다. 지금 나를 불만족하게 만드는 압박과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누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욕망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며 예수의 생명을 맛볼 때만이 욕망의 무서운 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유일한 만족은 영적인 만족에 있습니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찬송가 94장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이 땅의 부귀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예수를 사랑하시나요? 이 땅의 부귀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내가 많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 힘들어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가 주는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부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하나님 제가 참 성전이신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참된 영적 생명을 누리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