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이 있다고 하면,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들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믿음’, ‘영생’이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16절 한 절만 따로 떼어 내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6절부터 21절이라고 하는 맥락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v.16
[16a]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요한’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상이라는 단어의 대부분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나옵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세상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상’은 영적 세상과 대조되는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세상의 의미 중 하나인 두 번째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입니다. “너희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의 의미가 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세상’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세상 속의 구별된 세상’의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 속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택할 자를 미리 정하시고 그들을 향해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나님은 우리들을 미리 아시고 정하셨기 때문에 정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사랑에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을 방해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 들어있는 우리들이 사랑을 받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결국 성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은혜 받은 자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독생자로 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으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또한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 자녀가 죽게 되는 경우입니다. 구약에도 사사기의 입다 이야기 가운데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죽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입다는 불량배를 모아 대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족속으로 말미암아 공격을 당하자, 입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입다가 약속을 하는데, 환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면 자신을 지도자로 삼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 가운데, 입다는 자신이 정말 승리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입다가 꾀를 내어 하나님과 딜을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케 해주시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갈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입다는 첫 번째로 뛰어나와 환영하는 것이 종이거나 가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입다의 외동딸이 그를 처음으로 맞이하여 나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삿 11:34)
한글은 한자어와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단어도 독생자, 무남독녀 등으로 번역합니다. 헬라어로 번역하면 다 같은 단어인 모노게네스 즉,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입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입다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게 됩니다. 성경은 또한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반복하여 이야기합니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삿 11:37)
물론 결혼을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입다는 지금 잘못된 서원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잘못된 서원은 회개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입다는 자신의 서원을 지키기로 합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잘못된 서원을 했음에도 순종합니다. 구약에서 이 이야기가 왜 기록된 것일까요? 독생자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순결하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입다는 전쟁에 승리했지만, 잘못된 서원을 한 탓에 사사가 되고도 사사의 일을 얼마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딸이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길 원하시는 독생자의 죽음입니다.
구약성경에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아들을 내놓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양을 준비하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들의 죽음이 얼마나 귀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독생자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16b]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의 반대말은 ‘영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을 얻었더니, 영원히 놀며 천국에서 재밌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같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영생’이며, 이 영생의 본질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깊은 친밀감을 얻어 그와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도 신적 본질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요? 맛있는 것을 혼자 많이 먹을 때가 아닙니다. 성숙해지고 행복을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맛 집에 가고 싶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서 먹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평소보다 좋은 것이 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을 통해, 함께 하는 기분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정말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의 자리에 서도 진짜 관계적 친밀감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면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시카고에서 열리는 큰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어떤 사역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혼자 사는 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혼자 사는 부자들이 그 집에서 혼자 살다가, 자살하고 알코올 중독과 마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그들을 상대하는 사역 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20-30년 일을 하여 큰 집을 장만하면 대부분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남게 되는 사람이 많은데, 이후 공허함 가운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나중에 무엇인가가 많아진다고 하여도 함께 행복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면, 비참할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독방에 갇히는 것입니다. 아무와도 행복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깊은 관계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이 장벽은 죄성이라는 장벽, 이기성이라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을 넘지 못하면 관계가 발전되지 못하고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결혼, 자녀 양육, 친밀한 관계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용하려하고 배려하지 않을 때, 관계를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는 자신의 죄성이 관계를 막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다른 신들은 인간의 욕망을 해결해주는 우상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죄성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게 되면 우리 안에서 점차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의존했던 자리에서 점점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은 쉽게 만족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허무함이 너무 컸습니다. 얻어 보니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누군가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 목표를 이루면 허무함이 사라질까요? 아닙니다. 인간이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돈’입니다. 돈은 사람에게 전능감을 가져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가운데, 자신이 전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전능이라는 것은 사람과 환경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환경과 주변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에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은 원래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랑할까요?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들어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매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똑같이 유혹을 받고 똑같이 흔들립니다. 세상은 파도가 치듯 요동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올해,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입니다. 주식과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입니다. ‘겨’는 실체가 없기에 바람이 불면 하늘 끝까지 올라가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느끼지만,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져 쓰레기처럼 여겨집니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존재는 가짜에 근거를 두고 하늘과 땅을 오고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근간이 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 1조원 이상을 가진 사람이 125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1조원은 죽을 때까지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는 많은 돈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애씁니다. 이처럼 욕망은 아무리 많은 물질로도 잠잠케 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불안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의존하는 일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잠언에 나타나는 아굴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8)
저 역시 이 기도 역시 진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자신이 없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기록된 대로 살게 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인생일까요!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만 자신을 먹여달라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다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갖지 못해 고통하며, 더 갖지 못해 불안하다면 지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친밀한 관계 속에 얻는 영생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vv.17-21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말씀을 보면, 제가 대지로 이야기한 ‘심판하기 위함’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지에서 사용한 세상은 아들을 거부한 세상이며, 17절의 세상은 세상 속의 세상인 하나님의 백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들이 구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심판이 동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존재하나 아들을 받아들인 자는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심판인 것입니다. 멸망의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심판의 상태입니다.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겉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일부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sns에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행복은 사진으로 찍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sns에 올리기 위해 맛있는 것을 먹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내가 먹을 때 기쁘고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로부터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로부터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구원자’인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인생의 진짜 불행은 ‘죄’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무서운 죄는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 냅니다. 욕망에 시달리게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 죄가 원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반드시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게 됩니다. 인간은 살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 죄라고 하는 영적인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하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죄를 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밖에서 찾지 못하면, 자신 안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망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가면 끊임없는 비교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이 화살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세상을 탓할 것입니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묻지마 폭행, 묻지마 범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세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우리 안에 불행한 이유가 죄 때문임을 모르고 주변 사람과 환경, 하나님을 탓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죄의 무서운 속성은 죄가 깊을수록 그 죄가 자신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연쇄살인범이 대체로 남 탓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하는 과정이 죄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민 21:4)
지금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떠돌았습니다. 걸어가면 일주일이면 가는 길로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길이 없는 광야길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민 21:5)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음식에 대해 불평하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하찮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화살을 돌립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6)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십니다. 불뱀이 물면 독이 너무 강해, 몸이 뜨거운 열에 시달리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불뱀을 보내신 것일까요? 인간은 원래 마귀에게 물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변을 깨물지 않으면 못 사는 존재입니다. 대부분 가까운 사람이 우리를 깨뭅니다. 우리의 뱀 같은 본질입니다. 사람에게 깨물리면 몇 년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로 깨물려 영혼 안에 독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신 이유가 그 불뱀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임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10번이나 반역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반복하십니다. 그런데 불뱀이 나타난 장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이와 같은 반응을 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민 21:7)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전엔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자리에서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길을 걷게 하시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드러나지 않았던 본질적 특성을 발견하게 하시고, 이 자리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예수를 붙잡는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인가요? 예수께서 뱀과 같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우리 인생의 여정은 결국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누리며 이전에는 불가능하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 천국에 간다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을 먼발치서 바라보고만 있고 싶으신가요?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부터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죄성이 점차 자유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선 자들이 복 받은 자들이며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이 자리에 서지 못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요?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은혜 받은 자는 어둠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빛을 거부합니다.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가 결국 두 가지 다른 길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빛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자들은 영생을 얻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과 결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이미 심판이며 정죄인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모하며 의존하여 이 영생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