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30일 주일예배 설교문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조건, 환경보다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건강한 자아상입니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으면, 좋은 환경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 가운데 살아도, 자아 인식이 좋다면 불행을 이겨내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연구해서 ‘회복탄력성’이라는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회복탄력성’은 불리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이 이겨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회복탄력성이 높다면 불행을 이겨내는 능력이 높은 것입니다. 건강한 자아인식은 회복탄력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자기의 인식이 왜곡되면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건강한 자아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자아인식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자아인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인식의 기초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도의 자아 인식의 기초는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vv.22-27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세례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낯설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의 한 분파였던 ‘에세네파’에서만 세례 의식을 중요하게 여겨서 행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유대인들은 손발을 깨끗이 닦는 정결 의식만으로 정결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의 적은 무리들만이 행하던 세례 의식을 전 이스라엘에 확산시킨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일에 예수님의 제자도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여전히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두 가지를 다 기록한 것일까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을 대조하며 떠오르는 태양이신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정결예식에서 요한의 제자가 유대인과 변론을 하는 이야기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유대인들이 왜 세례를 베푸는지에 대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가 신이 나서 세례를 베푸는 이유를 말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세례 베푸는 것을 변론하며 엄청난 자부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하게 되면 반드시 뒤따라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변론하기 전에는 이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없다가, 말을 하다 확신이 생겼는데 독점적으로 세례요한이 행하던 세례를 예수님이 더 많이 행하자 마음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한에게 질문합니다.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는 세례요한만 했던 일인데, 예수란 사람이 등장해 사람들이 그쪽으로 더 많이 쏠리자 제자들의 입장에서 불편해진 것입니다. 궁금해서 질문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그만두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대답합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사역을 한 것이 세례를 준 것이, 그리스도로 오해를 받기까지 영향력을 미친 것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며 삶에 주어졌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인식의 기초입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행한 일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은 경쟁자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돌렸습니다. 이런 인식을 갖지 못했으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 세례요한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결과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했을 때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를 그분에게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끌고자 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우리가 원하는 자아상이 저마다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상은 거의 다 좋은 모습입니다. 남들이 좋아하고 남들이 멋지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이길 원하고 공부를 잘하기 원합니다. 좋은 것으로 나를 치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내가 멋진 존재가 되길 열망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멋진 존재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원래 주어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의 능력은 우리의 유전적 부분으로 타고난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유전적 영향을 받습니다. 애쓰고 노력해도 능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탁원할 능력에다가 엄청난 노력까지 결부되어서 전 세계에서 몇 명 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결국은 이미 주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부모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고 상처를 받은 자들은 다른 부모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면 많은 부분을 바꾸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주어진 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바꾸고자 하는 부분이 다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영광을 얻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 영광을 나는 얻고 싶은데 하나님이 마치 내 인생 가운데 그것을 제한하셔서 내 환경에 주시지 않은 것이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성경적으로 내가 영광을 얻고 싶고 능력만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목받고 싶은 마음을,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상숭배는 삶 속에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멋진 영광을 얻는 자리에 서는 것과 그런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모든 쾌락과 안정을 내가 원하는 만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가 드러나는 전형적 두 가지 모습입니다. 우상숭배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경은 에브라임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북이스라엘을 북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에브라임 족속이라 부를 때는, 우상숭배를 지적할 때입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
북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지파 중 하나인 에브라임을 북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말하는데, 왜 우상숭배와 연결된 족속으로 불리는 것일까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삿 12:1)
원래 입다가 에브라임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도와주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입다는 하나님께 잘못된 서원을 하고 전쟁을 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랬더니 에브라임이 입다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불렀는데 오지 않았으면서 전쟁에 승리하자 영광을 취하고자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냐고 이야기합니다. 이때뿐만 아니라, 기드온이 전쟁을 했을 때도 이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번 상황은 입다가 서원을 잘못하여 무남독녀가 죽게 된 상황입니다. 입다는 상처 입은 사자와 같았습니다. 그런 사자에게 덤벼드는 에브라임을 입다는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유명한 장면인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해보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못하면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하는 자리에서도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빠져버립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4)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숫자입니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교회를 곱하면 144인데, 무한수인 1000을 곱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숫자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중 에브라임 지파의 이름이 빠지고 다른 이름으로 대체됩니다.
“…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8)
원래 요셉 지파는 없습니다. 요셉의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아들이 한 지파씩 가져갑니다. 요셉 지파라고 하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둘 다 포함되어야 하는데, 므나셋 지파는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브라임을 빼고 요셉지파라고 에브라임을 대신해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우상숭배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무서운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같은 우상숭배는 우리가 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멋진 모습으로 내가 드러나길 원하고 하나님이 얻으셔야 하는 영광을 내가 얻지 못하면, 분노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물려주지 못하여, 원망하고 계신가요? 하나님이 불리하고 모순된 속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을 답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불러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좋은 환경이 다 갖추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 믿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인간은 모든 것이 잘 될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불리하고 모든 온전치 못한 조건을 통해 내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영광을 갈취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인도하고자 한 하나님 노릇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왜곡된 자아 인식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환경을 허락하시지 않았더라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에 설 때, 우상숭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자아 인식의 기초는 무엇인가요?
2.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vv.28-30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존재로 보고 있는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남들이 계속 좋게 봐주길 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향해 사람들은 그리스도시라고 이야기했는데, 세례요한은 아니라고 부인하며 자신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세례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를 높이며 이분이 진짜이기에 믿어야 한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것입니다. 일반적 개인이 위인 전기에게도 나오지 않는데,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생으로 산다면, 우리 인생은 거기에서 멈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스스로를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가 큽니다.
물론, 욕구가 전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에도 중증의 게임중독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아무런 욕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 실현의 욕구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욕구가 너무 강렬하여 이 욕구밖에 없게 되면, 끊임없는 좌절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돈이 많아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 때, 이런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1등을 하며 공부를 잘하며 인정받는 학생이었지만, 대학에 왔더니 더 잘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입니다. 말로만 이전에 들었던 ‘포토메모리’라고 책을 읽으면 그냥 다 외우게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밤을 새서 공부한다고 해서 이런 아이들과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대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좌절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능력이 있어도 없어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 힘든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얻는 것조차 힘듭니다. 인생의 목표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욕구를 우리는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욕구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욕구 자체는 힘이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들은 방향성을 돌려 예수님이 얼마나 괜찮고 멋지신 분인지 드러내는 일에 힘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말하는 들러리의 기쁨입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들러리는 신랑신부를 돋보이게 합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돋보이고자 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민폐하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일까요? 나의 잘남을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잘남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더 잘날 인간을 만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기쁨의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욕구로 바꾼다면, 자연스레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과 같은 분이 없으시며, 예수님만 우리를 실패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용납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이와 같은 예수님을 높이는 일에 우리 인생이 사용되길 간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약해져야 합니다. 약해지는 것만큼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원리는 우리가 강한 것을 자랑하고 뽐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우리를 짓밟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우리가 약한 척을 하면, 금방 와서 짓밟고자 하기에 우리는 약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본질에서부터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자신을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치고 사라지는 ‘소리’입니다. 목적은 성취되지만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성경은 ‘자기부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무엇을 부인해야 하나요?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어려운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렵고,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 우리는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옛자아를 죽이시고 진짜 아름답고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자아를 생겨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자아가 죽은 만큼 예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아직도 펄펄 살아, 자아의 모습만 나타난다면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용서할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자신을 증명하고자 애쓰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맞다고 주장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외로운 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죽이지 못해, 자아가 우리를 두려움과 욕망으로 충동질할 때,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는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왜 예수는 흥하고 자신은 쇠해야한다고 이야기한 것일까요? 이 길이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 7:28a)
모태에서부터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을 예수님께서 계속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b)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였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와 똑같은 마음, 영과 가지고 세례요한보다 가장 위대한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지금 노력한다고 해도 세례요한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은 예수의 영이 드러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어떠한 인간보다 위대한 예수의 모습으로 인정해주시며 가장 높고 위대한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싸움과 고난, 전쟁이 있습니다. 나를 높이고자 하는 옛자아가 펄펄 뛰고 있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자아가 죽임을 당해, 자기 부인이 되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수의 모습, 하나님 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드러내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이 땅에서도 그 놀라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