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모든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계 가운데 가장 큰 한계는 인간은 영적인 것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하더라도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을 온전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인 것을 바르게 알려주시고 무슨 의미인지를 가르치시고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왜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을 알아야 할까요? 영적인 것이 인간 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동물이 유전자도 비슷하고 행동이 비슷하여 거의 같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은 물질의 세계에서 본능이 충족되는 삶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본능이 충족되면 만족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 이상의 존재적 이유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며, 왜 존재하는 것인지,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동물들은 물질적이고 외적인 환경과 조건이 채워지면 그것에 만족하지, 거기에서 불만족을 경험하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것의 답을 찾아야 하고 갈망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온전하게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나요?
1. 진리를 알게 됩니다. vv.31-33
[31a]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31절에서 36절은 요한이 3장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나오고,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요한이 3장 전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위에서 오시는 분은 예수님을 의미하며, 땅에서 난 이는 세례요한을 의미합니다. 세례요한은 인간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인간적 한계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의 일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땅의 수준으로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앞에서 무엇이라고 증언하였나요?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내가 너희한테 진짜 생명을 주고,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관심을 돌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형태를 띄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단, 사이비의 집단의 리더는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과장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믿게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는 탁월할 수는 있으나 진리에 관한, 생명에 관한, 우리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근원적 영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31b]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반복해서 31절에서 두 번이나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며, 만물 위에 계시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월성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잃은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 가운데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비감이 발가벗겨졌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비감이 있었기에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경외감, 신비감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유익을 얻지 못하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주식의 오름과 내림을 파악하게 된다면 예배당에는 사람이 가득할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세상에서 이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인생을 결정짓고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에서 답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인간은 근원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율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순간순간의 선택에서 우리는 무엇인가의 영향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영향력과 배후에 있는 마귀의 어둠의 영향력을 받게 됩니다. 그 결국 파괴이며 멸망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자율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영적 노예가 되어 어둠의 길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땅의 것을 초월하여 참된 진리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갈지라도 좌절하며, 더 탁월한 지혜를 필요로 하며 보호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권으로 우리 인생에서 행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보다 보호의 기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인간처럼 수십 년을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소를 생각했을 때, 송아지를 20년씩 데리고 다니며 교육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모가 50대의 아들을 봐도 무엇인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람의 인생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나이를 먹었다고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처럼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의 답을 다 가진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맞는 것인지 매번 고민하며 선택을 불안해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자에게 우리 인생에서 진짜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며 인도해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월자이며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세상에서 말하는 영적 경험은 다 간접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시간과 장소, 감각을 초월합니다. 무엇인가 보고 들었다는 것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틀 안에서 자극이 미치니, 자극이 어떤 형상과 음성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많이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해도 더 큰 문제를 갖게 됩니다. 죄의 근원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왕처럼 만들고 신처럼 되어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죄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게 영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인간의 본성과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악한 행동을 하는 것만 어둠이 아닙니다. 악한 행위라고 하지 않고 어둠이라고 하는 진짜 이유는, 이것이 내면적이고 영적인 죄악과 관련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어둠을 지적하고 드러내어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둠은 아담처럼 선악을 우리가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본성과 늘 충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꿀처럼 달게 들리고 정말 좋다라고 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무서운 근원적 자아의 죄성이 제거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것만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진리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것저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의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돈과 사람을 의존하는 것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믿음은 전적 의탁이기에 순종이 자연스레 나타나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내면에서는 믿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어둠은 나 혼자 왕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강력한 영적 권세가 우리 영혼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은 이 어둠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행 26:18)
어둠이 사탄의 권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만을 감당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이 어둠이 사탄이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인쳤다는 것은 바꿀 수 없게 확증하여 온전하게 내가 받아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진리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셨던 그 진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메시야를 보낼텐데, 메시야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자기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나이가 변함에 따라 전부인 줄 알았던 것이 늘 변합니다. 저 역시 10대 때는 공부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대, 30대, 40대 생각이 변합니다. 그제야 이전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유일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내 인생의 다른 답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는 아닌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어떤 과정을 통해서도 예수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생명을 주는 분임을 영혼에서부터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땅에 속한 자이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땅에 속했다는 것은 인생의 엄청난 한계를 가져옵니다. 영적인 은혜를 받아도 일상에서는 세상의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렵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무런 영향력 없이 혼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새가 공기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자유를 찾는다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한다면,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얻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를 살짝 믿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자유가 아닌 구속과 노예 상태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아주 심각한 노예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마약중독자, 성중독자, 도박중독자를 욕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중독되어 있습니다.
제가 교회 오는 길에 커피를 마시고자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를 이용하는 차들로 인해 교통이 정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밀리는 가운데도 그 자리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것일까요?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것에 중독되어 삽니다. 유튜브, 돈, sns, 성공, 인기에 중독되어 미쳐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데, 진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찾아옵니다. 불교인들은 수행을 하고 애를 써서 자유의 자리에 가고자 합니다. 열반이라고 말하는 자유의 자리에 가고자 하지만, 열반에 이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스님들 수행을 몸부림치며 하지만 열반에 못 이르는 이유는 땅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이 만들어 낸 땅에 속한 방법으로는 자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이며, 예수님으로 만족하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나요?
2.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vv.34-36
[34a]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예수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그 분의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없기에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십니다.
[34b]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에 의해 예수님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온전한 하늘의 일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실 수 있었던 근원이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기름 붓는다고 하나요?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기름 부을 때, 조금 붓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적실만큼 부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움 받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노예된 자를 풀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찾겠다고 하는 것이 마귀의 노예되어 사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도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를 잃고 더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노예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예수님의 주권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주권이 예수님께 있으니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으니 우리의 주권자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우리는 클수록 걱정이 많아집니다. 부모가 아무리 걱정하고 고민해도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답이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답입니다. 인간의 오묘한 인생을 사람이 간섭하여 원하는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교회, 우리들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결정하시고 그것들을 우리 인생 가운데 인도하여 공급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지 못하여 불안해하며 걱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만물의 으뜸은 모델, 대표자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나요? 이 땅의 시선으로는 잘 살지 못했습니다. 가난하며 세상의 영향력 있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힘들게 사셨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아마,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실제로 본다면 비참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났더니 예수가 만물의 으뜸으로 하나님의 회복을 보여주실 모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요, 온 세상의 주인으로 사시는 분, 영광스러운 존재로 다시 오실 분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를 당하였어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그들은 하늘 생명을 가지고 예수를 끝까지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삶은 한계가 있고, 원하는 이상이 있지만 그 이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다른 사람이 사는 삶의 환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상형이 자꾸 높아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만도 커집니다. 하지만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면, 그 때마다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 분이 우리 모델이 되셔서,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덜너덜해도 가장 영광스런 자리로 초청받은 것입니다.
[36a]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영생은 이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한 고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이 끝이면 초라하게 살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 이 땅의 삶이며, 이 땅에서 찬란한 것을 포기하고 영생을 소망하며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 인도해나가십니다. 이런 사람들만 이 땅에서 자유를 얻어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어 누리는 자들만 진리를 통한 자유를 얻어, 노예된 모습으로 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돈으로부터의 자유, 명예로부터의 자유, 자식 농사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이 영생을 얻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나요?
[36b]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믿는 것이 결국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내적인 것입니다. 그에 대한 외적인 것이 순종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순종을 하지 못하며, 순종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금은 당장 나타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로 임할 때, 두려워 떨게 될 것을 요한계시록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만 가능한 것이며, 영생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어 이 땅에서 자유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서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