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과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잘 안다고 해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신앙의 깊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계적으로 깊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방해물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는데, 우리의 방해물로 인해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1. 현실적 필요와 편리입니다. v.15
예수님께서 13절과 14절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 구절을 들으면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씀을 예수님은 어디에서 하셨나요? 광야의 우물곁에 앉으셔서, 한 여인에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놀라운 말이라고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우린들은 그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여도,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며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도 신문에 황당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 전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이야기에 반응할까요? 내적으로 그것에 대한 결핍과 열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도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실이며,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이런 말을 한다면 정말 황당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여기서의 ‘생수’는 ‘샘의 근원’을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샘물의 근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황당한 발언에 여자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15a] 여자가 이르되 주여 …
이 여자는 예수님이 처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9] …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
방금 전에 ‘당신은’ 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거리감을 두었는데, 예수님이 영생의 샘물을 주겠다고 하시니 ‘주여’라고 태도가 바뀝니다. 이 여인 안에 있는 호기심과 기대감을 이 단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한 것일까요?
[15b] …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에게는 황당한 이야기를 귀 기울이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현실적 필요이고 다른 한 가지는 현실적 편리입니다. ‘물’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에 팔레스타인과 같은 황량한 곳에서 물은 그 자체가 생명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 물을 뜨기 위해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 왔습니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었습니다. 이 물을 매일같이 길으러 왔다 갔다하는 것은 불편하고 괴롭고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에 귀 기울인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현실적 필요와 현실적 편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를 하시지만,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것은 현실적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주셔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깊은 갈망을 해결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지금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현실적 필요와 편리를 위한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이렇게 관계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기록해두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맥락과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필요해하고 생각하는 관점에서만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필요로 한 모든 것이 필수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는 나머지,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물’, ‘공기’, ‘햇볕’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 외에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필수적이 아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열망하는 편리가 인간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스마트폰, 이것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너무나 필요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부모님이 스마트폰을 빼앗았다고 몇 년 전 저희 집 근처에서 중학생 아이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엄청나게 편리합니다. 편리해졌으나, 행복해지셨나요? 정말로 필수적인가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중독 증상은 인생을 파괴하는 엄청난 도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고생들은 하루에 7시간 정도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평균이 7시간입니다. 문제가 무엇인가요? 중독이 단순히 유튜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인생을 파괴하는 ‘포르노’나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때에는 관계적으로 행복을 느낄 때입니다. 스마트폰은 인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밥먹으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필요라는 것, 인간의 욕망이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냅니다. 욕망이 큰 사람일수록 필요한 것이 많아집니다. 필요가 많을수록 점점 더 불행해집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우리가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아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옷과 집, 차 모두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욕구가 더 구체적이고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이 없으면 불행한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불행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제가 가끔씩 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보면서, 힐링이 됩니다. 자연인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을 압축하면 ‘사업이 망하거나’, ‘죽을 병에 걸렸거나’, ‘가족의 해체’ 등입니다. 배경도 늘 ‘산속’이나 ‘섬’같은 아주 외진 곳입니다. 자연인들은 그곳에서 자급자족을 합니다. 대부분 전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는,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곳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아파트에서는 물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전기가 없이 삽니다. 그 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에 관심을 가지며 살기에 삶이 단순해지고 건강해집니다. 그 날 밥만 세 끼 먹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단순해지니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며,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늘어나면, 영혼이 점차 쪼그라들게 됩니다. 인간의 관심이라는 것은 한정적이게 되어있습니다. 매일 어떤 집에 살까, 어떤 옷을 입을까, 어디에 여행을 갈까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는데, 우리 영혼 안에 어떻게 영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과분수입니다. 원래 인간은 영혼이 크고, 영혼의 영적인 힘으로 육신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육은 비대해져서, 무엇을 즐길까를 생각하니, 우리 안에 영이 쪼그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보다 악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육신이 점점 편리해지면,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인간은 편리해지면 더 편한 것을 찾게 됩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기대고, 기대면 눕고 싶습니다. 인간은 끝이 없이 편리를 욕망합니다. 하지만 편리할수록 영적인 감각이 둔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 때문에 수도사들은 굉장히 불편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일부러 이렇게 살까요? 영적인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부러 고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생에서 더 편리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점차 힘을 잃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 내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쳤고, 편리를 위해 모든 관심을 기울였는데, 어떤 사람보다 필요한 것을 얻지 못했고 가장 불편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신적 편리를 위해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짜 편리요, 맛보지도 못한 진짜 생명을 주셔서 정말로 목마르지 않고 갈망으로 몸부림치지 않는 인생으로 인도하시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2. 눈에 보이는 의존의 대상들입니다. vv.16-18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이 지금 영원한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니, 엉뚱한 이야기를 하자 충격요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대화를 계속 해봤자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편리하고 필요한 것을 달라는 여인에게 여인의 중심 가운데 그 여인을 흔들 수 있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여자 뿐 아니라, 누구든 인간 안에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폭로되면 이와 같은 반응을 합니다.
[17a]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부인’을 합니다. 모든 사람의 일반적 반응입니다. 은밀한 곳을 지적한다면, 사람들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대부분은 처음에 부인, 부정의 반응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이 충격요법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일반적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두드리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남편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 여인의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숨김없이 드러내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나의 문제, 나의 상황을 그 분이 나타내실 때,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이렇게 찾아오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가요? 예수님은 부인하는 여자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17b]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여인에게 괜찮다며,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인하고 싶고 감추고 싶습니다. 가끔씩 자기가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투시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투시의 은사를 간절히 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원에 갔을 때, 기도원 원장이 투시의 은사가 있다고 했지만 이 모든 은사는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하여 그 사람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은사를 하나님께서는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 그 사람을 조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 안에 악한 것이 가득함을 아십니다. 그것을 보시고 겉모습이랑 다르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괜찮다고 하시며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은밀하고 영적 어두움이 우리 모두에게는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시기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며,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남편이 이 여인이 지난 수년간 자기영적 갈망을 해결할 쉬운 의존의 대상으로 삼던 우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많았다는 것, 결혼까지 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 찾기 힘듭니다. 고대에 남편이 5명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엄청 예뻤을 것입니다. 이런 힘든 결혼은 왜 한 것일까요? 예뻤으나, 무능력했던 것입니다. 남편을 의존하는 길만이 고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는 혼자서 죽거나 몸을 파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창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자 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필요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자가 쉬운 의존의 대상이었지만 실패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까지 실패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 가운데 가장 깊은 갈망을 가졌기에 예수님이 일부러 택하신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것이구나 하며 의존했지만 실패를 경험해야, 예수님을 의존할 수 있습니다. 한 두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의존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빨리 돌이키는 것이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킬 수 있는 비결입니다. 물론 젊어서 무엇인가 열망하는 것이 나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열망해봐야, 그것이 다가 아니구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며 추구하지만, 거기서 그것들이 내 인생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답이라는 사실을 깊게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 가운데 쉽게 의존할 대상이 많으면 영적으로 더 불행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돈도 추구해보고, 인생의 다른 취미를 찾습니다. 능력이 많아 자신의 관심을 이곳저곳에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오히려 더 불행합니다. 어쩌면, 아무런 능력이 없고 의존할 것이 없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영적으로 더 행복하고 은혜 받을 조건을 가진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시기 우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영생하는 샘물을 맛보아,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가짜 우상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