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예배의 원어적 원래적 의미는 ‘엎드려 절하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배라는 단어는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향한 숭배의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예배라는 의미 자체가 내가 중요하고 가치있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숭배 태도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렇기에 다 예배자입니다.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숭배하고 높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돈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예배하는 것이며, 건강이 그렇다고 하는 사람은 건강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들이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훈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이 ‘가화만사성’이었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절대화하는 순간 오히려 더 고통하게 됩니다.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일까요? 가정에서 불안한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절대 가치화하는 순간 어떤 문제가 발생하나요? 평화가 조금만 깨져도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가정이란 것은 태어나서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과 어른이 되었지만 부모 역할을 성숙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가정은 온전하고 평화로움을 늘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절대 가치화하는 순간, 더 많은 고통과 힘듦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사람의 예배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헌신된 예배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잘못된 대상인 남자들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을 왜 예배했을까요? 남자로 말미암아 영혼의 공백, 공허를 해결 받고 친밀감, 안정감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남자를 절대화하여 계속해서도 붙들어온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를 통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5, 6번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한두 번 정도면 알게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만 하면 외로움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안정함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래서 기대감으로 결혼을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면 내 배우자가 그것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혼해도 외롭고, 불안정합니다. 사람이나 환경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남자들을 바꾸어가며 안정감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했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반복적으로 결혼을 하였더니 어려움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그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제까지 예수님을 한 유대인 남자로만 바라보았는데, 자기 인생에서 쉽게 알 수 없는 은밀한 비밀을 처음 본 남자가 이야기하자, 예수님을 선지자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갑자기 뜬급없이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왜 갑자기 예수님을 선지자로 했다가, 예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요? 이 여인에게 남편을 통해 얻고자 한 시도가 얼마나 큰 갈증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남자가 자신의 한계와 절망을 채워줄 수 없음을 깨닫고 영적 반응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영적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여인의 이런 깊은 갈망의 근원 안에서 종교적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보다 내면적 갈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깊은 갈망의 상황과 현상을 보여주기 위해 이 여인을 예수님이 택하시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주변에 갈망이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 사람이 있고 꼭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망이 크면 고통도 커집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갈망을 가지고 있기에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한다고 나온 사람들 중에 우리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더 큰 지위를 얻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그 자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갈망이 크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갈망은 단순한 남자 때문이 아닙니다. 남자가 좋아서 결혼을 계속해서 한 것 아닙니다. 영적인 깊은 공허가 눈에 보이는 쉬운 해결책을 찾도록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누구보다 내면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1에서 100까지의 점수를 스트레스로 매기면, 결혼은 46점이고 이혼은 74점입니다.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하면 합쳐서 120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것을 5번 하였고, 600점입니다. 인간의 스트레스 한도는 약 300점 정도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그런데 600점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문제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 영적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 여인은 내면이 파괴되어 관심을 영적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예배에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것이 예배의 장벽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심 산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 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적 반응을 할 때, 깊은 갈망으로 영적 열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 길이 막히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을 깊이 사로잡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벽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도 갈망 끝에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후배가 그랬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캠퍼스 사역을 했습니다. 대학교마다 교회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기에, 주중에 대학교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양육했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저의 후배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무렵 자신이 갈망이 심해지고 신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서 종교를 탐색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로 초청하였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교회에 대한 반감이 심하셔서 다른 곳은 다 가도 교회는 안 된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설득 끝에 캠퍼스 모임에 그를 초대하였고, 그때 저는 요한복음 4장을 마침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열변을 토하였고 그는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에게 복음에 관해서 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저에게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저의 편지를 보았고 다시는 저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연락이 끊어지고 3-4개월 후, 그 학교에서 그 후배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저에게 누구냐며 물었습니다. 그리고 후배가 수행중이라 아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산도 수행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세상 안에는 영적 갈망을 가진 사람을 넘어뜨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단들 역시 마귀적 유혹으로 그 갈망을 이단에 빠지게 합니다. 예전에 묵상의 숲에서 말씀을 배우던 목사님 중에도 신학교에 다니던 중에 이단에서 성경 공부를 했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행이 2년 정도 후에 빠져나와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만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영적 갈망이 장벽에 막혀 더 깊은 고난으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믿으면서도 외적인 성공을 하고 싶고, 환경을 더 편하게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절대화가 되고 유일한 가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 더 깊은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해결책을 이야기하십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놀라운 일입니다. 길이 막혀있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해 포기하였는데, 장소가 상관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a]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
여기서 ‘너희’는 ‘사마리아인’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장소만 그리심 산에서 예배한 것이 아니라,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받아들여 그것만 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예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2b] …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런데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되면 유대인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알고 바르게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갈망을 가진 그녀에게 참된 예배를 가르치시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참되게 예배할 수 있나요?
1.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23a
[23a]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
예수님이 참된 예배를 이야기하셨다면, 거짓되고 헛된 예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헛되고 거짓된 예배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의 조건은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무엇을 예배했나요? 자신의 욕망을 예배했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깊을 갈망을 우상시하며 그것을 채워줄 남자를 예배의 대상으로 교체해왔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자기중심적 예배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숭배인데, 다른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자기 자신을 예배의 대상으로 올려놓았기에 은혜 받았다는 것이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들 때임을 볼 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충족을 은혜로 착각합니다. 예배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가 흥분했고 눈물을 흘렸냐는 것은 예배의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충족에 두며, 은혜를 받았다는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이 움직였을 때입니다. 이렇게 감동을 찾아다니면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사역했던 교회에서 40일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새벽기도 때, 아침에 찬양을 하는데 2-3시간씩 몇 천명이서 찬양을 불렀는데, 감정적 흥분이 엄청났습니다. 그 흥분을 맛보기 시작했고, 그곳이 천국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40일이 딱 끝났더니 그 간극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상에서 그렇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새벽기도가 끝난 후, 예배가 너무 재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10분 15분 예배에 만족을 못 느껴, 더 감동적인 예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감동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예배의 대상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고 싶은 것과 듣고 싶지 않은 것을 취사선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필요한 이야기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과 청년부 수련회를 할 때, 은혜 받게 하는 것은 ‘연애, 결혼’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청년들은 이런 이야기에 반응을 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죄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남의 죄 이야기는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죄악을 지적받을 때, 마음을 닫고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 시절 아이들은 자신들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됩니다. 어른이 되면, 듣기 싫은 것도 듣게 되며 대화가 됩니다. 자기를 위해 예배드리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중심적으로 예배드리시나요? 아니면 자기 중심적으로 예배를 드리시나요? 여러분의 본질 안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반응으로 바꾸시길 축원합니다.
어떻게 참되게 예배할 수 있나요?
2.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vv.23b-26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옛날 성경은 이 구절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문은 ‘영과 진리’인데, 신령과 진정이라고 하니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신령이라고하면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웃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신령하게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을 검은 저고리, 흰 치마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진정’은 마음을 짜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한 번 드리면 진이 빠집니다. 다행히 개역개정에 ‘영과 진리’로 해석을 해주어서 다행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짜내어 힘들게 예배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는 ‘성령으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셔서 장소가 필요 없고 우리가 언제든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침대에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영으로 만나는 것일까요? 성령을 받은 자들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놀면서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자체가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로’는 진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만 예배가 가능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구약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우리 인생의 모든 목적은 비어버린 영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움 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를 맺으며 영생을 누리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바로 이것을 구약의 말씀이 전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결국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부음 받아, 구원자이신 예수를 인정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낸다고 하나님을 더 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내 자아와 싸워야 합니다. 자아가 줄어든 만큼,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받아들여 성령이 우리를 이끄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성령으로 예수를 통해 예배할 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이 여인도 그 갈망과 고민이 깊어서 결국 해답을 자기 자신은 불가능함을 알게 된 것이며, 메시야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메시야 열망을 갖게 됩니다. 로또를 사는 사람도 로또 메시야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대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갑자기 구원해줄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시나요?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명확한 답입니다. 이제 예수를 통해 메시야가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자리에 서고, 꿈꾸는 삶을 살아도 여전히 공허하며 여전히 외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 성령을 통해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갈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