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제 인생 가운데도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길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의 여정을 바꾸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전 합동 측 신학대학원이 아닌 다른 쪽 신학대학원을 가려고 계획했는데, 제 친구가 총신대 신학교가 좋은 이유를 이야기하고 설득하여 막판에 이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다른 쪽으로 갔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전에 사역을 할 때, 유학 갈 마음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머물려고 했는데 동역자가 저를 유학 가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억지로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이 아니었으면 제 인생에서 중요한 복음에 대해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한 교수님을 통해 성경의 깊이를 깨달았고 놀라운 보화가 숨어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성경을 배우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고 학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복음적으로 성경을 깨닫게 한 여러 영향력을 미친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도 설교를 하는 것이 맞다고 지지해주시는 여러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만남 가운데, 인생을 가장 많이 바꾼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표면적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종교적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저의 약점으로 인해 목회를 하더라도, 지금처럼 목회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을 하여, 이것이 큰 영향력이 되어 중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랜 기간 저의 내면을 살펴보면,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만남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한 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나요?
1. 무익한 자가 유익하게 됩니다. vv.27-30, 39
[27a]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타이밍에 제자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타이밍입니다. 대화 시작 무렵에 제자들이 왔으면, 깊은 대화로 이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제자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이들이 오자마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 것에 의문을 가집니다.
[27b] …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물론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 끼어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눈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이 이상하게 여긴 점들은 사람들이 인간 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들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는 무엇을 구하는가라는 것에서 관계에서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땐, 그 여인을 통해 얻을 만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될 때 관계를 맺는데, 그 여인은 그 필요를 채울만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이익관계를 따지지 않고 관계를 맺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가족, 가까운 친구 외에는 무엇인가를 얻고 있기에 그 관계를 계속해서 맺습니다. 이 여인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과도 관계 맺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세상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마, 모든 사람들에게 무익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무익함을 넘어 사람들을 고통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5번이나 결혼하고 이혼한 여인은 내면에는 독가시를 가졌을 것이기에 관계 가운데 상대를 고통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될수록 이 여인은 내면의 악한 것이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 번째로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며 관계를 맺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이 랍비로서 존경을 받으려면 이런 여인을 기피했어야 합니다. 길 가다가 자신의 아내를 만나도 랍비들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음란한 여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예에 큰 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는지 중요하게 여기는 때가 ‘사춘기’부터입니다. 남의 시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것 때문에 가장 고민하는 때가, 결혼 할 때입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서 결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결혼 상대를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돋보이게 할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본질에 ‘자기이기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일반적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익을 얻을 것이 없고 손해만 보는데, 예수님이 왜 대화를 하는지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익을 얻고자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용한 자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우리가 꼭 필요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상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자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무익해 보이는 여인과 관계를 맺으신 목적은 이것입니다.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인이 이 무익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혼의 근원에서부터 깊은 갈망이 여인의 관계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여러 번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진짜 문제는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동네 사람과의 관계를 깨트린 원인이 ‘여인의 채울 수 없는 영적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이 근원을 치료하시고자 이 여인은 만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해결 받을 수 없는 영적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에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근원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가려는 우리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근원을 치료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바로 희생이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희 집에 비누가 1000개나 있어서 이 많은 비누를 주변에 나누어줬다고 사랑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셔서 그 능력 많은 것을 우리에게 나눈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사랑을 베푸시지 않고 죄인과 같은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본인이 다 감당하시는 희생으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희생으로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에게도 그런 희생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죄는 인간을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랑을 먼저 보이시고 우리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기성에 근거해 관계를 맺고 일을 합니다. 사람이 사랑을 베푼다고 해도, 그 사랑은 다 반쪽자리 사랑입니다. 자신이 좋아 보이는 사람에만 헌신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좋아서 결혼을 해도 감정은 변하기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우리 역시 나의 유익이 되면 좋아하지만 손해가 오면 무섭게 돌변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희생하는 사랑을 보이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지난주에 방배동에 새로 이사 간 목사님이 계셔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사를 하신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신지는 저보다 오래되셨습니다. 교회의 8-90% 3,40대 초반이며 안정된 교회입니다. 이전에는 서초동에 교회가 있었는데, 지하에서 15년간 예배를 드렸습니다. 공간이 좁아서 허물어져 가는 빌라를 얻어 교육관을 얻어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이사를 하자는 얘기가 나와 이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강남에서 움직이려니 돈이 많이 들어서 고민을 하였는데, 젊은 부부가 목사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교회에 이사 갈 때가 된 거 같아서, 교회 이사를 위한 헌금을 작정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원래 살던 아파트를 두고 교회 근처로 이사와서 빌라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 전세금 4억 원을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부부가 헌금을 하면서 다른 성도들도 은혜를 받아서 20억 원이 모아져 교회 건물 한 층을 샀고, 돈이 남아 5-60억원이 되는 교육관을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헌금이 가능한지를 생각하며,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전세 보증금 전부 넣어 교회를 이사하게 하고 파장을 일으켜 수 십 억 원을 들여 이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시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변화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변화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의 수준은 집에 수도를 놔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수도가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수준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것이 변하면 좋아지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불편하게 생각하고 고통하는 것이 달라져도 우리 영혼이 변화하지 않으면, 이 생수를 맛보고 경험함으로 근원이 변화하지 않으면 환경이 달라져도 우리는 똑같은 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극적 변화를 허락하십니다. 극적 변화를 얻자마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몰래 물을 길으러 갔던 여인이 자기도 자기가 부끄러운 것을 알지만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한 사람의 인생이 예수께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도구가 되는 유익한 인생이 있을까요? 우리 인생 가운데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돈과 능력을 사용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도움은 일시적입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큰 도움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 인생 가운데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까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김일승은 좋은 사람이었어 정도만 평가받았다면 제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식에게 남들이 주는 유산과 혜택을 줄 수 없는데, 자식이 예수님을 모르게 된다면 제 인생은 실패한 인생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우리를 통해 예수님께로 인도받는다면 어떤 인생보다 유용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런 무익한 여인이 어떻게 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을까요?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이 여인의 삶 자체가 극적이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삶을 사는 여인이 극적 변화를 받은 것을 보며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극적인 변화를 통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간증은 매혹적입니다. 이런 분들의 간증이 그 목적으로 사용될 순 있어도 인생 가운데 잔잔하게 모태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열등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와 상황, 목적에 따라 하나님은 개인마다 주신 사명과 은사가 다른 것입니다. 저도 예전엔 극적인 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에 이를 열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려서는 방학 때마다 저와 동생들을 데리고 기도원을 다니셨습니다. 그 중에 여러 번 갔던 기도원이 있는데,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였습니다. 이 분이 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기에 아직도 생생합니다. 무릎 아래가 한쪽이 없으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설교 시간에 욕을 엄청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은혜 받겠다고 사람들이 아멘하는 모습이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이분이 6.25 전쟁터에서 무릎 아래를 잃게 되었고 자살기도를 하였지만 실패하여 깡패가 되셨습니다. 명동의 백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변화를 받는 모습을 보고 어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를 뒤엎겠다고 하고 갔는데 거기에 갔다가 말씀에 은혜를 받아 삶이 변한 것입니다.
그때는 저는 몰랐는데, 요즘 다시 떠올려보면 이 분이 소나무 뿌리를 붙잡고 기도했더니 사람을 치유하는 은사를 가졌고 많은 사람들을 고쳤다고 합니다. 차범근 선수도 이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고 무릎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요? 그 당시 한국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목사님이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을 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모이게는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것이죠. 사마리아 여인도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극적 스토리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 여인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스토리가 없더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가치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나요?
2.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vv.40-42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사람들이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그 누구도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만날 순 없지만, 그 분의 말씀을 우리는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간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울 때입니다. 저도 성도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전달해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계속해서 듣고 그 안에서 성장하게 도울 수는 있습니다. 제가 열망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침체되어 가고 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이것이 한국 교회의 본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성경 지식들은 초보자 수준의 말씀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깊어져야 합니다. 결혼을 해서 가까이 지내더라도 서로를 점점 더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깊이 안다고 하여도 우리는 더 알아야 할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고 어떤 은혜를 주실 지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면 성장이 멈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말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예전보다 우리는 자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 유튜브나 텔레비전을 보셔도 오래 보실 것입니다. 그것을 시청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그 시간 가운데 말씀을 계속 가까이 하며 들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수 없다면 말씀을 계속 들어야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이상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서 한 두 명만 나와도, 그 공동체 전체가 그 영향력 가운데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안에 말씀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이런 변화의 끝이 무엇인가요?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고백하게 되는 성장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나의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 전체가 모두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난과 고통으로 힘든 삶을 살던 그들이 초라해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인정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맛보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뛰어나시며 예수님만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