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밥만 먹고 살 집이 있고, 입을 옷이 있으면 만족할 것 같지만 기본적 욕구가 다 채워지더라도 새로운 욕구가 생겨납니다. 인간의 욕구는 너무 다양해서 한 가지가 채워진다고 계속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땐, 행복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다양한 욕구로 인해 불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채우고자 하는 다양한 욕구 외에도 성도가 가진 또 다른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 욕구입니다. 영적 욕구가 채워지는 유일한 방법이 ‘영적 양식’입니다. 성도는 영적 양식을 먹고 욕구가 채워져야 세상의 욕구를 뛰어 넘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영적 양식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vv.31-34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를 하는 것을 제자들이 기다리다가 제자들이 대화가 끝나자 마을에서 가져 온 음식을 예수님께 권합니다.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는 양식을 안 먹어도 되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음식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양식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합니다.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상황을 통해 영적인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이처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한 적이 많습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내가 먹고 만족하는 것의 근거가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세상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진짜 만족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영적 근거가 무엇인지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것’, ‘남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근원이 왜 시작된 것일까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뱀의 꼬임대로 인간이 스스로 결정권자가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좋고 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기적인 것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여기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쉬운 성경으로 번역하면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우리들의 삶에 대해 자랑하는 것입니다. …”([쉬운성경] 요일 2:16)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좀 더 편하고 즐겁기 위해, 내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기위해, 내 인생에서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재미가 없다면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이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하는 것을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 이기심으로 인해 육적인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노예를 만들어버립니다.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선하다는 것과 인간의 시각에서 선하다고 하는 것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자녀가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부모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돌합니다. 어릴 때는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달고 맛있는 것만 먹고자 합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단 것을 먹으면 좋아하고, 더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해서 허락하면 나쁜 습관이 들어 건강이 안 좋아집니다. 패스트푸드를 먹이고 좋아하는 것만 먹이면, 건강에 문제가 생겨 큰 일이 날 것입니다. 아이가 좋다라고 여기는 것이 먹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충돌하는 영역이 점점 많아집니다.
어떤 한 부모가 자녀로 고민하다가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중학생이 된 자녀가 유튜브와 게임만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밥을 차려놔도 밥을 먹지도 않고 과자와 라면만 먹는다고 합니다. 체육 외에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맞벌이 하는 부부가 너무 답답해서 자녀에게 공부를 하라고 했더니 그 아이는 자기 인생을 알아서 살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내가 알아서’의 본질은 힘들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하지 않고 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중독적이고 쾌락에 의존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아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는 것은 단순히 이 땅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래 만들어진 창조의 목적, 본래의 인간다움을 회복하여 예수님처럼 이 땅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것은 세상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 선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족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 또한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나의 이익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점심메뉴를 기도하며 결정하시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간절히 기도하며 금식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큰 문제가 생겼거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중요한 뜻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우리 인생에서 결혼할 때, 취업할 때, 투자를 할 때처럼 큰 이익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도록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돈에 의존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마귀의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또에 당첨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당첨된 사람 가운데 80%는 그 이전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로또 전문가가 마지막에 코멘트를 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돈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큰 생물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돈을 가지게 되면, 그 돈에게 사로잡혀 인생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이 있을 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결혼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열심히 구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3일 금식을 하고 이 여자와 결혼을 해도 되는지를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결혼했는데, 문제가 생길까봐 이기심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일주일을 기도하고 그 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구하지만 나의 욕구가 채워지는 답을 얻고자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만족할 땐, 자신의 욕구가 채워질 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구는 저마다 너무 다양합니다. 결혼을 통해 친밀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표면적으로 이것은 채울 수 없습니다. 친밀감에 관한 욕구는 영적 욕구에서 근원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만드신 목적은 이와 같습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뜻이 결혼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부부 관계를 통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자신의 욕구만 채우고자 하는데, 이런 경향성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이 이기성을 깨트리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원하는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결혼을 단순히 외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적 욕구가 채워지기 원합니다. 이 욕구가 크고 강하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얼마나 많이 골랐을까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되는 순서대로 골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판단 가운데 선하다는 결정을 하였지만 이 여인의 인생은 자신과 자신과 결혼했던 모든 남자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율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담긴 말씀입니다. 내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 안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100%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비워진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 사랑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며 벗어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자기 자신으로 꽉 찬 우리의 영을 점차 깨트리며 다스려나가실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온전한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기 원하는 하늘나라의 모습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사랑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입니다. 인생에서 수천억 원의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 혼자 살고 있다면 소용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태, 사마리아 사람들의 상태가 깨어진 관계 가운데 살아가는 전형적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마리아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와 그들이 구원받게 된 상황이 그들 가운데 추수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여인의 이러한 간증 하나에 사람들이 어떻게 몰려올 수 있는 것일까요? 영적으로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과 구원자이심에 반응할 수 있나요? 자기 중심적 이기성으로 살아가며,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은 사람만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죄를 금방 없애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죄로 인한 고통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십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병을 빨리 치유 받는 방법은 빨리 병을 아는 것입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몸 안에서 몇 년, 몇 십 년째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암이라고 판별이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 간의 여정 속에서 암세포가 뭉쳐져 암으로 진단이 가능할 때입니다. 암으로 발견될 때는, 파괴적 영향력이 강력해질 때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것을 붙들수록 그것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파괴와 멸망, 고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저희 교회 가운데도 복음에 깊이 반응하는 분들이 계신데, 인생이 다른 사람보다 고난으로 가득했던 분들입니다. 방황도 하며, 아픔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음을 근원 안에서 인정한 분들이 복음에 더 쉽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그렇기에 이와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죄가 가져오는 상태가 이곳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죄가 만들어 낸 결과는 ‘포로’, ‘눈 멈’입니다. 이 상태의 고통을 경험한 자일수록 예수님이 자유를 주실 수 있다는 복음의 말씀이 어떤 누구보다 쉽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파함으로 영적 추수가 가능한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은 먼저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추수에 동참하는 자로 부르십니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추수는 그 씨를 뿌리고 거두는 사람의 노력에 동참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씨 뿌린 자가 따로 있는데, 우리를 향해 추수하는 기쁨에 동참케 한다고 합니다. 진짜 기뻐할 사람은 씨를 뿌리며 가꾼 자입니다. 삯꾼이 되어 그 전에는 아무 일도 안하다가 추수때에 가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함께 기뻐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 25년간 구조대원을 한 분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구조대원의 일은 밥도 잘 먹지 못하는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중간에 출동할 것을 예상하며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말에는 10시간씩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출돌을 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가운데 25년간 어떻게 힘든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는 것이 이 일을 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배지를 보여주며 심정지인 한 사람을 살려내면 은 배지, 열 명 이상을 살려내면 금 배지인데를 받는데 자신은 금 배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통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열 명 이상인 것입니다. 그 분에게 누군가를 살린다는 희열이 25년간 그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고난을 통해 복음을 먼저 알게 하신 이유는 이 기쁨에 먼저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다 다릅니다. 전도를 하는 사람이 전도의 열매를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 전도를 잘 한다고 예수를 믿게 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제가 똑같은 설교를 하여도 어떤 사람은 은혜로 반응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준비하며 이끄시는 지의 차이입니다. 노력하지 않은 것에 참여하여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때, 이 세상에서의 욕망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놀라운 희열과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 하늘양식을 맛봄으로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하늘 양식으로 채움 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맛보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