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성경에서도 믿음에 대해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과 관련된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300여 번 나올 정도로 성경에서도 믿음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믿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고, 어떤 큰 믿음을 가지는 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 것일까요?
믿음은 어떻게 발전되나요?
1. 한계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vv.46-47
[46a]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
가나는 예수님이 맨 처음 기적을 행하신 그 곳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가나에 먼저 들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주 곤란한 문제를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46b] …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가버나움이라는 곳은 갈릴리의 중요 도시입니다. 가나로부터는 30여키로 떨어진 곳입니다. 왕의 신하라고 하면, 당시에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권력만 큰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요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의 신하이며 큰 권세와 부요를 가진 사람, 이제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힘, 세상의 쾌락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까지 오르기 위해 애를 쓰고 많은 탁월한 조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력과 부요를 가져도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어떤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인생의 정점에서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그 갈등과 좌절은 더 크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부터 잘 하지 못했던 사람은 나중에 무엇인가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자주 경험한 일이기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런 경험이 없던 사람은 좌절의 상황 가운데 더 크게 절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엔 하지 않았을 일을 합니다.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이전에는 한 번도 어떤 사람에게 나의 인생을 맡기고 의존하지 않았던 사람이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직접 찾아와 한 무명의 청년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이 사람이 경험하는 절망의 깊이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문제가 생기고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며 참 안 됐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 큰 믿음을 갖기를 열망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내 안에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도를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과 의존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 일찍 찾아오는 것이 악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과 의탁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계를 일찍 경험한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빨리 만나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인생에서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자신과 자기 주변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경험합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절망을 경험하고 자신을 의존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아주 늦은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면, 절망의 상황 가운데 비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문제였다면 더 심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내 맘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예수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맘대로 살다가 죽음의 순간 앞에서 예수를 의존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일찍 이런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더 큰 믿음을 가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며 도구입니다.
저의 인생 가운데는 많은 한계 상황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데 이런 상황들을 통해 저를 의존하는 것을 점차 내려놓고 예수님을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런 내려놓음을 많이 경험한 영역이 인간관계의 영역입니다.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도와주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인생 가운데 내가 어떻게 이끌 수 없음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가족의 인생 가운데 저라는 존재는 아무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한계를 경험하고 계시지 않나요? 애를 써서 바꾸고자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가만히 놔둬야 하는 존재인가요? 이럴 때가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 의존할 때입니다. 사람에 대해 분노할 때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큰 문제가 생기는 거 같은데, 하나님이 각자의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믿음이 없으니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절망을 경험하셨다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입니다. 지금 바로 하나님이 더 큰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발전되나요?
2. 예수님만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vv.48-50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왔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왕의 신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앞에 나오는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며 예수님을 환영한 것을 보았습니다. 진실한 믿음과 표적과 기사를 의존하는 믿음 사이의 큰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는 그 상황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만, 절망의 상황에서 자기 포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대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신하가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하나요?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멀리까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아이가 죽기 일보직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 다시 한 번 간구하는 것입니다.
[47] …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
예수님을 향해 주님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적 권세와 지위를 누린 사람이기에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인으로 부릅니다. 자신의 아들이라고 했던 것을 ‘내 아이’라고 사랑을 담아 표현합니다. 고쳐달라는 간구를 죽기 전에 와달라는 간절함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음은 절대 의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자리에서 다른 것이 끼어있으면 이것은 믿음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신하가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선다는 것은 절망적인 일입니다. 눈에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판단 가능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당시에 어쩌면 눈에 보여도 더 믿을 수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가장 전제되는 것은 그 대상이 어떻게 보이냐가 아니라, 우리 안의 절박함의 깊이입니다.
절대적인 절망의 깊이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는 의존을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어떤 자가 하나님께 겸손을 구한다고 바로 겸손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겸손은 영적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렇기에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겸손해라, 온유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영적 본질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개입하시며 우리 인생을 다루시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 내 인생 가운데 손을 뻗어 붙들 수밖에 없을 때, 영적인 겸손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런 겸손이 만들어질 때, 어떤 영적 성품이 함께 생기나요? 바로, 온유함입니다. 예수님만 의존할 수 있어야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합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증거를 본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가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갑니다. 이런 순종의 반응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든 예수를 끌고 가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고 갑니다. 이것이 믿음이 생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온유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겸손한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존하고자 하는 교만한 반응을 합니다. 자연스럽게 돈에 집착하며 내 인생을 바꿔줄 것처럼 끊임없이 의존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단순히 믿음 없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 내내 교만하게 살게 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이 강퍅하게 반응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셔도 돈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세워가려고 하니, 미래가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을 다른 차원으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반응할 때,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교만하게 살아가면 남들이 볼 때에는 행복해보이겠지만, 그 본질 안에서는 쉼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신하는 지금까지 예수를 몰랐던 자가 예수를 믿고 순종했더니, 그 때 믿음의 마지막 단계인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결과를 보며 믿음이 완성됩니다.
믿음은 어떻게 발전되나요?
3. 말씀이 응답되는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vv.51-54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지금 자신의 주인이 자기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멀리 떠났으니,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어할지 종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달려와 주인에게 아들의 상황을 알린 것입니다.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일곱 시는 지금의 시간으로는 오후 1시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후 6시까지를 하루로 치고 밤이 되면 다음 날로 이야기했습니다. 1시쯤 예수님이 가라고 이야기하셔서 지금 저녁 때가 된 것입니다. 어제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정확하게 맞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왜 물어봤을까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나 우연으로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확신에 차 말씀하신 것을 믿었기에 그것이 확실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그 뿐 아니라 온 집안이 예수를 믿습니다. 성경에서 온 집 안이 믿은 경우가 고넬료의 집안이 있고, 빌립보의 간수의 집안도 믿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 온 집안이 예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믿음이 이루어짐을 볼 때,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이런 능력을 경험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절망과 좌절을 통해 예수만 믿을 수밖에 없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결과만을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경험하고 그것을 고백하며 그것을 더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왕의 신하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실제적으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밖에 붙잡을 수 없어서 순종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 예수를 믿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지만 왜 전제로 믿음이 필요한 것일까요?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상황을 거치지 않고 그냥 살아났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연히 벌어진 일을 기뻐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절망의 상황이 왕의 신하의 인생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3)
이 왕의 신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자기 재산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을까요?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의 인생, 자기의 쾌락과 안정을 위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며 성경에 이렇게 예수님을 섬긴 자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인생에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부끄러움과 후회의 자리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의 인생 가운데, 죽으면서 세상의 것을 아쉬워하며 후회하는 사람이면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이름만을 위해 산 부끄러운 인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마무리할 때,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모든 순간은 기억될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한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결과로 나타날 때, 그 때 내 욕심과 내 생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믿음으로 하신 일들을 고백하며 우리 인생 가운데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첫 번째 가나의 표적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참된 기쁨 회복하시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는 믿음의 결과를 보게 되며 예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한계와 절망을 통해 큰 믿음의 자리, 믿음이 응답됨으로 하나님 나라가 놀랍게 임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