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한자로 배은망덕(背恩忘德)은 다른 사람한테 입은 은혜를 저버리는 악한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배은망덕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닌 반역하는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38년 된 병자를 통해, 인간의 배은망덕한 행동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배은망덕한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나요?
1. 무능합니다. vv.1-5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한복음은 시간의 순서대로 쓰기보다는 주제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어떤 명절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셨다가 바로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것이 2절 상반절에 등장합니다.
[2a]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
여기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는 단순한 지역의 지명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인데, 양문이라는 곳은 성전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양이 오고가는 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다니지 않았으며 희생 제물만을 위해 열어둔 곳입니다. 성경에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의 뜻도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공간의 배경이 되는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상징물들입니다. 그런데 2절 하반절과 3절 상반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대조되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2b] …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a]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성경에 나온 숫자가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행각, 기둥이라는 것이 다섯이 있습니다. 다섯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오경, 율법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인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인데 무능한 인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맹인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없고 다리 저는 사람도 잘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은 중풍병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며 그것과 반대되는 인간의 영적 무능함을 보여주는 그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능한 자들, 영적 불능인 자들은 무엇에 의존하나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3b] …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여기에 나온 구절의 앞뒤를 보면 꺽쇠 모양의 괄호([])가 있습니다. 성경에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설명을 위해 후대에 첨가된 내용입니다. 원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는 미신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에는 물이 움직이는 현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못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입니다. 물을 채울 때마다 물이 움직인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움직이는 것이 천사들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미신을 퍼트렸고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무능한 자들은 미신에 의존합니다. 세상에서도 무능할수록 더 많은 미신을 믿습니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은 한몫 챙기고자 하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가 많습니다. 가장 로또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로또 명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명당에 가면 잘 당첨될까요? 중학생 정도의 확률만 배워도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한 번 당첨되었다고 또 당첨될 확률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번호를 매번 뽑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면 당첨이 될 것이라는 미신을 믿습니다.
영적으로 무능한 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존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능할수록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것을 의존합니다. 오늘 무능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38년된 병자가 등장합니다.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평균 생존 연령이 40세라고 합니다. 평균 수명이 40세인데, 38년 간 병자로 살았다는 것은 인생 내내가 병자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명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중풍병과 같은 마비 증세를 앓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을 통해 인간의 영적 문제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38년은 무엇을 보여주는 숫자인가요?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 2:1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40년 떠돌았는데, 구체적 기간은 38년입니다. 2년은 시내산 밑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후 가데스 바네아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38년간 광야에서 떠돕니다. 38년은 인간의 반역,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구체적 숫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1-3)
왜 통곡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정탐한 사람들이 그곳에 거인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곡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 노예 상태에 있던 자들을 구원하고 홍해를 가른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고 시내산에서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인간의 본질적 자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반역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38이라는 숫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무능하게 살아갑니다. 개인이 가지는 다양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멋진 모습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무능함은 영적 무능함입니다. 아무리 잘난 모습을 가져도 인간은 육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무능함을 가집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죄가 지배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집니다. 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결국을 가져와 가까운 관계가 고통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우리 모두 문제가 있고 무능하며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는데, 무능한데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한 세대라는 40년 동안 이 땅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자녀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반역한 죄의 짐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옛 자아와 새 자아를 구약에서는 출애굽한 첫 세대와 자녀 세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무능하고 반역하는 옛사람과 함께 인생 내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무능함을 경험하며 답답함을 경험하며, 내 자신이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성도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으로 도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합니다.
배은망덕한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나요?
2. 남 탓만 합니다. vv.6-13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38년된 병자에게 물어보신 이 질문은 아주 이상한 질문입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는 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으셨는데, 왜 이 사람에게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요? 바디매오가 무엇을 원하냐는 질문에 보기를 원한다고 했던 것처럼, 38년 된 자도 낫고자 하는 질문에 ‘네’라고 할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을 토해 냅니다. 38년 동안 병자로 살았다면 다음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원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대신 먼저 물에 들어간 자들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38년 간 병에 고통 받는 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남을 탓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 탓을 하는 것입니다. 남 탓을 하면 자신의 무능함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문제가 없기를 원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미성숙하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사이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투사’라는 방어기제 중의 하나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왜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것일까요? 단순한 방어기제가 아니라, 죄의 근원이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 탓만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런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a]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
예수님은 왜 은혜를 모르는 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일까요? 성경에 나온 대부분의 사람이 은혜를 아는 자들의 모습만 보여주고자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죄성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해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구약에는 사울이라는 대표적 모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나쁜 왕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 역시 이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길을 가버립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양한 존재를 만드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르침의 도구로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하필 이 사람이 치유받은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일부러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9b] …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가지고 자신의 의를 쌓고 남 탓만 하는 죄성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사용하였기에 이 사람을 통해 죄의 본질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율법만 미쉬나에 39가지가 있습니다. 각각의 종류마다 세부 규정이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면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예를 들어, ‘운반하기’라는 카테고리 안에 무엇은 가능하며 무엇은 안 되는지에 대한 세부 규정이 있습니다. ‘끝내가’라는 카테고리 안에 역시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일 명령을 구체적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 규정 만이 다른 사람의 행동과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세부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점수로 매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남을 평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가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금만 관찰해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기 의를 쌓고 남을 비난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 해도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안식일 규정만큼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안식일을 잘 알지 못하였기에 주일도 안식일처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금지된 사항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 전통에도 주일에 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금지조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주일에 무엇인가를 사먹고 공부하는 것으로 평가하실까요? 인간의 남 탓하는 특성과 너무 잘 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유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주일 성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인간의 죄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자의 틀로 남을 평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된 특성, 38년된 병자와 같은 죄성입니다. 이 모습을 우리는 끊임없이 안고 살아갑니다. 예수 믿어도 남을 평가하는 특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이렇게 이 사람이 안식을 계명을 깨트린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지적하자 그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이 사람이 또 예수님을 핑계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론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인데, 자신이 비난받기 싫어서 예수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인간의 본질과 속성, 어떤 상황 가운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고자 하는 특성, 우리 안에도 얼마나 많은 이러한 부분이 있나요?
배은망덕한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나요?
3.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다. vv.14-18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3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 움직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엄청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38년을 누워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리가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에게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심한 것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죄악이 이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자신은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지 예수 때문에 어긴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 의를 찾기 위해 예수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자기 의와 은혜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자기 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은혜를 거부하기에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규정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38년된 병자를 통해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안식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안락한 환경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본질 안에서 기쁨을 주는 안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갈등은 커지고 비참한 일은 많아집니다.
얼마 전 부모가 40억 정도의 재산을 형제에게 남겨주고 돌아가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정신 지체가 있어 형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는데, 형은 40억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죽였다가 잡혔습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예수 없이 절대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무능함 가운데 고통할 때가 있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붙든 것입니다. 예수를 붙들 때마다 그 분이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의를 벗고 예수를 붙들 때, 예수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자 애쓰십니다. 우리는 만들 수 없는 안식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인간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것이 배은망덕한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며 서로의 잘못만 탓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필요함을 인정하고자 한다는 고백을 할 때마다, 배은망덕한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움을 고백하는 자들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고백하는 자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