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구약성경에는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약 400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왜 이렇게 축복과 저주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고자 그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고대, 현대에 모두 복과 저주를 사람들은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도 사용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을 떠올리나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으로 풍요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복이 될 수 있을까요?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그 이후에 불향해질 확률이 70%가 넘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순간은 기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재작년 전주에서 형이 10살 어린 동생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애가 좋은 형제로 소문이 났지만 관계가 깨진 이유는 형이 로또 1등에 당첨되었기 때문입니다. 형이 독식한 것이 아니라, 동생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다른 형제에겐 1억 5천씩 나누어주었는데 막내 동생에게는 집을 사주었고 남은 돈으로 형은 전주에 식당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당이 점점 어려워져서 막내 동생에게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대출을 받았는데, 점점 더 어려워지고 대출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인 동생에게 빚 독촉이 가자, 둘의 사이는 점점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동생의 분노어린 비난에 형이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되서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궁극적이지 않으면 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은 궁극적인 만족, 행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복만이 궁극적인 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무엇인가요?
1. 영원한 심판을 피하는 것입니다.
[24a]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생명을 얻는 길, 심판을 피하는 길, 구원받는 길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뒤,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쉬워 보이는 길이 사실은 아주 어려운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대표하여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율법에 능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복은 현세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물질적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은 현세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의존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행색을 초라하고 강한 힘이 없어 보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않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며 신앙생활을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쉽게 받아들이고 열광하며 좋아하는 것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할 때, 열광합니다. 요즘은 과거와는 달리 아주 세련되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노골적으로 그런 약속을 하였습니다.
잠실의 어떤 교회의 목사는 자신을 따라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며, 책에 자신이 성령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니 화장실 4개있는 방, 억대 수입, 벤쯔 등 재산이 부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책을 출판하며, 그 사람의 이름으로 300권 정도의 책이 나왔고 그 책은 그 교회에 가야하며 책의 가격이 가장 싼 것이 10만원이라고 합니다. 비싼 책은 10억 원인데, 그 안에는 부자가 되는 엑기스와 같은 비결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이러한 노골적인 거짓말 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한 목사님이 신앙과 돈이라는 설교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요즘 유행하는 돈에 대한 많은 설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성경에서 아브라함, 야곱, 이삭을 통해 돈에 대한 바른 신앙을 전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분은 아브라함의 용기와 결단, 이삭의 본질에 대한 충성, 야곱의 책임과 근면성 그리고 요셉의 대한을 제시하는 판단력이 이들을 큰 부자로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특별히 요셉의 경우에는 자기가 살고 있던 조그마한 지역에 있지 않고, 넓은 지역으로 갔기에 큰 역할을 했다며 자식들을 넓은 곳으로 유학 보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말 같습니다. 이런 설교에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도 예수님의 말씀과는 관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이것에 대해서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까요? 내가 원하는 욕망을 단계적인 방법을 밟아 가면 이룰 수 있다는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쉬운 해결책입니다. 무엇인가 복을 얻어내는 데 쉬운 해결책과 같아 보입니다. 종교적 양념을 쳐서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은 이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24b] …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이 약속하는 영생, 진짜 좋은 복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심판을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영이 없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에 대해 성경은 좋은 곳, 금으로 만든 길, 큰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합니다. 심판이나 죽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아 나중에 불구덩이에 가서 마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입니다. 성경에서는 마귀 또한 불구덩이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됨이 선포되는 것이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없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알지만 죽은 자들은 그런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원래 육신만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흙으로 만들어져, 짐승처럼 감정도 있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지능이 있는 상태를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생기가 그 안에 들어와 영적 존재가 되어야 성경은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면 살아있다는 증거가 보여야 합니다. 살아있지만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다면 생기가 들어있기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아 반드시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우리 안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에겐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살아 있기 전에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녀도 남편을 미워하고 가족을 학대하는 사람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알지 못하는데도 화목한 가정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단순히 가족 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확장된 것입니다. 마피아는 다른 사람은 죽이면서 가족은 사랑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본능적, 이기적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살면서 원수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진짜 원수를 만난다면 원수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원수를 두고 기도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하면 미움이 더 심해지는 것을 저는 경험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로 말미암아는 불가능한, 생명을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할례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할례란 포경수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왜 성기의 끝부분을 자르는 것일까요? 남성의 성기는 그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잘라서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생각하는 존재를 자르고,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만드시겠다는 언약의 표징인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마음의 할례를 받아, 옛 마음이 죽임을 받고 새 마음이 나타나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을 얻게 된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기 전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례를 베푸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왜 생명의 증거를 주로 이웃사랑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사랑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랑이 있다면 이웃을 향해서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이렇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옛사람이 이기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이기적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자극하십니다.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생명을 예수님과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통해 믿는 자에게 전달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가능합니다.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을 혼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기준인 사랑에 있지 않는 자는 다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 맺는 길이 영원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원래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비참하고 서글픈 것이라면 참 생명을 가진 자는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한 일은 무엇인가요? 이 땅에 살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행할 사랑의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정한 도덕적 기준에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이나 이런 기준에는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는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랑이 문득 나타나, 진짜 생명이 있음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러한 사랑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생명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의 생명이 빛으로 나타나면 반드시 그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같이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이 생명을 만들어내셔서 문득문득 나타내는 사랑을 느낄 때마다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제 안에 추악한 죄악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생명이 제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며 평안과 사랑을 집어넣으시고 그것이 문득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이 놀라운 기쁨이고 감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심판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심판의 기준을 세우심으로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무엇인가요?
2.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vv. 25, 28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은 바로 당시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음성을 듣게 되나요? 다 죽어서 뼈만 남은 자들이 에스겔을 통해 대언할 때, 다시 살아나는 말씀을 가져와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 37:1-2)
무덤에 뼈가 가득한 곳에 에스겔을 지나가게 하신 것일까요? 그 상태를 자세히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절대로 살아날 수 없음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물어보십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문제라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저주받은 상태의 자들을 어떻게 하실 지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뼈가 쌓인 죽음의 모습이 저주받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4-6)
대언할 때, 죽었던 자들이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고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놀라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 죽어서 누워있는 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뼈만 남은 자들이 이렇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대언을 했더니 음성을 듣고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깨어난다면,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두려워서 죽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성경은 무덤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이것을 아는 자들은 세상이 무덤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무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무덤이라고 여기기에는 살아있는 존재가 너무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며, 죽어있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너무 예쁘고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을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살아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죽은 자들과 함께 누워 ‘괜찮아, 난 여기를 더 멋지게 만들 거야. 아름답게 무덤을 만들고, 이 무덤에서 영원히 살 거야’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무덤 속에서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 이 말씀을 열심히 묵상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삶이 어려워 힘든 가운데 그 상황이 무덤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찬양을 틀고 있다가,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이 무덤 같고 지옥 같았습니다. 울다가 이 상황이 무덤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무덤 속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기뻐할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불안으로 작용해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며 내 영혼이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전에도 건강으로 고통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또 아픈데, 그것이 그 당시에는 절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무능함, 열등감, 답답함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게 다가왔습니다. 무덤을 썩게 만든 것이 내 영혼에서 피어올라오던 죽음의 냄새였습니다. 영혼 속 분노, 불안이 피어오르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한 시간 반을 울다가, 저는 하나님께 ‘제가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과정을 지나가며, 점차 숨을 쉬게 되며, 피가 돌고 살이 올라오는 것 같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돈이 없어도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고, 몸이 안 좋아도 절망하지 않고, 무능하고 열등감이 들 때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 어제 밤에 이런 설교를 준비해서 그런지, 너무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교회 오니 젊은 부부가 교회 문 앞에 있었습니다. 꿈에서는 잘 아는 분들이었는데 실제로는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가 갑자기 저에게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두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캠핑에 취미를 갖게 되었는데, 캠핑이 너무 재밌어서 교회를 못 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듣고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고 펑펑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니, 우리가 교회 안나가겠다는데 ‘왜 울어?’라는 식으로 쳐다보는 눈길을 보고 놀라서 깨어버렸습니다. 꿈을 깨고 나니, 그들이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부모님 세대에는 헌신하고 애썼는데, 이제는 캠핑 가겠다고 교회 안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해 누군가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누군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도 먼저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죽은 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무덤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