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먹는 것으로 여러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세상의 종말을 그리는 영화에도 먹는 것으로 싸우는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먹는 것이 제대로 충족되어야 다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배고픈 상황에 있을 때 이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5천 명의 남자가 있었고, 노인과 여자까지 합치면 2만 명이 모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 배고픈 상황에 처했습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마 14:15)
예수님을 따라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빈들까지 왔던 사람들이 저녁까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먹을 것을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성경 속 놀라운 기적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입니다. 그 다음으로 놀라운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한 번에 배부르게 먹게 되는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배고픈 사람을 밥 먹이시는 것이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런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고자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vv.1-7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성경에는 무리와 제자들을 항상 구별하여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이익이 올 것을 기대하고 따르는 무리입니다. 이익을 얻고자 대상을 따르거나,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보거나 자신이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당장에 돌변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고픈 중에도 예수님을 광야까지 따라왔는데, 이 무리들이 복음서에서는 어떤 존재가 되나요?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눅 23:18)
똑같은 무리가 한 때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추종했지만, 그들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예수님을 죽이기를 열망합니다. 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무리의 힘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 15:15)
이 무리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적은 상황에 따라 쉽게 변질되는 무리를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이 이 표적을 행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가운데 많은 일을 허용하십니다. 그런데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성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냥 벌어지는 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그 과정을 통해 세워나가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왜 유월절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것일까요? 대표적으로 유월절은 죽어야 할 자들이 예수를 통해 살아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지에 대한 믿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셔야 하는데, 그 가르침의 과정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한계를 드러내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왜 많은 제자 가운데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일까요? 빌립이 가장 이성적이고 셈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영역에서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폭로하고자 빌립을 대표자로 선정하신 것입니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상태와 본질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믿지 못하는 본질을 이 상황을 통해 폭로당하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믿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강한 의지를 가지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합니다. 믿음은 하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일과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자질과는 상관없습니다. 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바라보며, 내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싹트게 됩니다.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하루 품삯, 지금의 8-10만 원 정도의 돈입니다. 200 데나리온은 2천만 원이 안 되는 돈입니다. 2만 명을 2천만 원으로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음식점이 많으면 가능했겠지만 고대에는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존재 가운데 이 사람의 마음까지도 아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눈에 보는 것, 내가 경험하는 것, 내가 아는 것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재단하고 판단하며,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과 판단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상황에 도달할 때마다, 고난이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영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성도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생각할 때 나의 계획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은혜의 여정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해결했다면,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계의 상황이 내 판단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분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제 인생 가운데도 제가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계획적이고 미래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아내는 제가 미래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제발 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수없이 많은 일들 중에는 이런 계획과 예측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말, 저의 한계를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 내가 동원하고자 하는 수단이 불가능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셨으면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으면 안 되었구나를 고백하게 됩니다.
이 교회를 시작하는 가운데도 이러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제 생각대로 되었다면 지금의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저의 교회가 가진 능력과 상황을 계산할 때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뛰어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내 생각보다 크시고 놀라우신 분이구나’입니다. 이를 통해 믿음이 조금씩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8년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인도하신 것을 바라볼 때, 미래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왜 큰 은혜를 베푸셨을까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불안합니다. 모든 상황이 예측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불안하게 만드는데, 이 모든 것은 저의 이성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흔적을 돌아보며,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놀라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한계에 도달할 때, 우리의 판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 가운데 믿음을 크게 만드실 지를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vv.8-15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a]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아마,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까라는 질문에 안드레가 주변의 사람을 살펴보았던 것 같습니다. 한 아이의 도시락을 보고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도시락이라고 하지만, 아주 하찮은 도시락입니다. 보리는 당시에도 일반적으로 먹던 밀에 비해 3배나 가격이 싼 곡물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리는 가공을 하더라도 굉장히 거칠고 질감이 나쁘고 먹기에도 불편합니다. 옛날에 가난할 때, 쌀밥 대신 보리밥을 먹었습니다. 보리밥을 하루 세 끼 먹으면 대부분 속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물고기는 보리떡이 거칠어서 먹기 힘드니, 물고기를 짜게 절여 젓갈처럼 양념으로 먹는 물고기였습니다. 주식은 그냥 떡인 것인데, 떡이 그냥 먹을 수 없기에 소금에 찍어먹듯이 물고기를 짜게 절여 반찬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밥 한 덩이에 짠지가 곁들여진 하찮은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아이가 가져 온 도시락입니다. 아이가 2-30명분의 도시락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정확하게 안드레가 이야기합니다.
[9b] …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았는데,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한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일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상황 가운데 우리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늘 무리를 배부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믿음을 키워나가시고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의 공급자가 되심을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 번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어도 더 큰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단순히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만 지나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마다 하나님의 백성에겐 의미가 나타나, 믿음을 가지게 되고 예수님만이 생명의 주인 되시는 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사건을 지나가면서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모든 어려움은 괜히 고생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는 어떤 일들이 있으신가요? 단순한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지나가는 인생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한계가 경험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는 자리에서 믿음이 자라나며, 예수를 생명의 주로 고백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0a]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 가운데 사람들을 앉게 하셨는데, 잔디가 많았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이야기한 것일까요? 광야 속에서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시는 예수님이 목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풀밭과 물가가 풍요롭고 안식이 되는 순간이 언제인가요?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며 광야를 지나본 사람입니다. 집 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사람에게는 풀밭과 물가는 안식의 자리가 아니지만, 광야를 지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그래서 광야가 존재하며, 그 광야 가운데 우리 인생 가운데 풀밭을 예비하셔서 쉼을 주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나요?
[10b] …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이 숫자는 남자의 수이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을 다 합하면 2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그린 많은 영화가 있는데, 제가 이 장면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어떤 영화는 바구니에 물고기와 떡을 보이지 않게 한 후, 축사 후에 바구니 안에서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영화는 예수님께서 바구니 안에서 물고기와 떡을 계속해서 꺼내도록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이 장면을 옆에서 본 자들은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이것을 그들의 원대로 주십니다. 먹고 배부르고 원할 만큼 풍족하게 채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구약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광야 가운데 먹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임을 보여주기 위함과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모든 굶주린 백성들을 풍요롭게 먹이시는 것을 실천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9]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9-10)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잡혀 있는 자들, 흑암에 있는 자들이 광야 가운데 풀밭에 앉아 메시야가 공급하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임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일을 영적으로 경험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영적 생명을 온전케 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나의 육적 만족을 추구하여 예수를 따르다가 예수를 반대하며 거절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자들만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가 얼마나 단 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픈 자들만이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배부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육적 배고픔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채워지면 어떻게 되나요? 다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걸로 끝인 것입니다. 육적인 것 외에 모든 욕구가 다 그렇습니다.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을 얻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자동차만 얻었으면, 집만 소유했으면, 여기에만 들어갔으면, 이것이 실현되어도 우리의 진짜 욕구를 채우고 만족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계속해서 욕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먹는 것은 1차적이고, 그 외의 모든 욕구, 자녀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모든 욕구는 끝이 없는 무저갱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더 목마르고, 아무리 만족을 경험하고 싶어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적 목마름을 시작하게 되실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근원 안에서 부족함을 느낄 때가,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저의 생명의 공급자가 됨을 경험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왜 예수님이 떡을 다 먹고 다시 모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왜 성경은 이것을 모았더니 보리떡 다섯 개로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12는 유대의 12지파, 예수님의 12제자로 12는 유대인과 관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3과 모든 것을 의미하는 4를 곱하여, 모든 것이 채워짐을 의미하는 숫자가 12인 것입니다. 5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인 모세 오경과 관련된 숫자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열두 바구니는 예수님이 이렇게 유대인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 15:36-38)
앞에서는 오천 명이 다섯 개의 떡으로 열 두 개의 바구니를 채웠습니다. 여기서는 ‘4’와 ‘7’이 반복됩니다. ‘7’은 성경에서 가나안의 7족속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7’이라는 숫자가 완전수이기도 하지만, 가나안 7족속을 의미하며 유대인과 반대되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4’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 표적을 보이심으로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영적으로 배고픈 자들에게 생명을 베푸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두 번만 행하시고 더 이상 일을 행하지 않으셨을까요?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사람들은 육적 만족을 경험하면, 당장에 나의 육적 만족을 경험케 하는 대상을 의지하여 그를 나의 구주요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육적 만족을 아무리 주어도 소용없음을 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공급자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육적으로 만족되어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우상으로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자 하시나요? 이 세상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시나요? 이런 상황으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가 경험되고, 한계 속에서 하나님이 영적 갈망을 채우시는 분임을 깨달아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께서 영혼의 양식을 채워 저를 살게 하옵소서라는 갈망으로 예수님께 반응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풍요로운 생명을 공급하심을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더 이상 배고프지 않은 영적 양식을 공급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