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성경은 성도의 인생을 광야 혹은 바다로 비유합니다. 왜 광야로 성도의 인생을 비유할까요? 광야에서는 물과 먹을 것이 없는 결핍이 절대적이고, 태양으로 말미암는 고통으로 인해 보호가 필요하며, 갈 길을 알지 못하는 막막함으로 인한 인도함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 고통,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 그리고 인도하심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지를 가르치는 것이 광야와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이 광야와 유사하게 성도의 인생을 성경은 바다로 비유합니다. 그 이유는 바다가 인간의 무력함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강렬한 욕구는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인생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하지만 바다와 같은 인생은 그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듭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다처럼 통제 불능한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경험한 폭풍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경험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통로가 됩니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시간적으로는 밤이고 장소적으로는 바다입니다. 밤과 바다가 합쳐졌을 때, 인생은 가장 큰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인간은 보는 것에 의존하는데,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면 불안하게 됩니다. 바다는 깊이를 알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곳입니다. 밤바다는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정말 바다 위에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왜 호수를 바다로 부르는 것일까요? 바다의 두려움을 호수를 통해 하나님이 통제하시는 상황 속에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모형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것인가요?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헤어진 상황이고, 제자들만 따로 배를 타고 바다 위로 갔습니다. 왜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어져서 따로 만나기로 한 것일까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5)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혼자 가셨고, 제자들만 따로 보내셨습니다. 무슨 기도를 급하게 하시고자 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러 가신 것이고, 이 믿음을 잘 배울 수 있는 곳에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막 6:48)
지금 깜깜한 밤입니다. 갈릴리 호수라고 하지만 긴 길이는 십 몇 키로나 되는 길이라, 폭풍우가 치는 호수에서 작은 배 위에 떠 있는 제자들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허용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떤 믿음을 배우길 원하셨던 것일까요? 이전에 제자들은 이미 폭풍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 8:26-28)
예전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폭풍을 만나자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자,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라는 질문을 합니다.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폭풍우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 인생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나요?
1. 바다를 밟으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vv.18-19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호수에서 평생을 살았던 어부들입니다. 자기 홈그라운드인 것입니다. 여기서 부는 바람, 물결, 물고기를 평생 경험하며 어디에 가면 물고기가 많고 적음을 알고, 수심의 깊이를 알고, 위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안 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많이 알고 배웠다고 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병원의 유명한 의사 선생님도 자신의 병을 해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명한 교육자가 자녀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잘 안다고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님이 파도가 엄청 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잔잔한 바다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상황 가운데, 파도가 4m-5m 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날아오시지 않고 걸어오십니다. 성경은 걸어오다라고 번역하지만, 이 단어를 성경적인 의미로 번역한다면 ‘짓밟고 오셨다’가 더 적절합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바다 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바다를 짓밟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 바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두렵게 하는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시 89:9)
바다는 성도가 통제할 수 없는 세상과 인생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똑똑하고 부자여도 인생과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코로나가 임할지 누가 알았을까요? 능력이 많다고 코로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며 세상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잘 아시기에, 미래를 아시기에 요동하는 세상을 잠잠케 하시며 짓밟으셔서 안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왜 바다가 이렇게 요동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몰아치는 이유는 바다에 리워야단, 악어, 용이라는 마귀 세력이 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
우리 하나님이 성도를 위협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요동케 하는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실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부러 바다를 짓밟고 건너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구약이 약속하는 하나님이며, 나만이 용의 머리를 깨트리고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세상을 이기는 안전함 가운데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갖지 않으면, 우리 인생에서 우리의 안전함을 보장하고자 애쓰는 모든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어려서는 몰라서 두렵습니다. 나이가 들면, 알아서 두렵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문제입니다. 너무나 아는 것이 없어서 두렵고 고통스러운데, 성장해서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너무 잘 알아서 두렵게 됩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많이 생길수록 걱정이 커집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하고 애쓴다고 세상에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교통사고가 날 까봐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인간이 자기와 주변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불안한 요소는 더 커져가고,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옭아매어 그 사람의 인생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합니다. 자신의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 통제와 개입이 다른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통제하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제하기 힘듦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인생마저 불행하게 만드는 결국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불안 가운데 믿음이 없음으로 일어난 것임을 깨닫고, 문제를 짓밟을 수 있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나요?
2. 지나가려고 하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 6:4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다고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던 것은 제자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기의 ‘지나가려고 하시매’는 ‘지나가려고 의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일부러 지나가려고 하신 것일까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한 행동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똑같은 구절이 세 번 등장합니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출 33:22)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지나가신 경우가 나오는데, 모세를 지나가십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었기에, 그에게 오셨지만 그를 만날 수 없어 모세를 바위 틈 아래 넣으시고 손으로 덮으신 뒤에 그를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최초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나가신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왕상 19:11)
두 번째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낙심하고 지친 상황입니다.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여 낙담하여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셔서 시내산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엘리야마저 지나가십니다. 엘리야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엘리야를 직접 만나실 수 없어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성도들이 열망하던 결국입니다. 하나님만 만나면 해결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만나실 수 없어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8, 11)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욥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이 내게 오시면 문제가 해결될 거 같은데,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해결될 문제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지나가시며 만날 수 없는 고통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하나님만 만나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을 기대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나라를 열망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러 제자들 옆을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요한일서에서 고백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열망하던 하나님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만지기까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직접 경험한 놀라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놀라운 복을 주실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보혜사라는 뜻은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며, 돌보아주며, 은혜를 베푸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오셔서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대신 예수를 믿는 모든 자에게 보혜사이신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성령을 보고 그분과 교제하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성령이 함께 계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통과 불안은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참 믿음을 가진 자로 성장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눈으로 보아야지만 믿는 것, 기복적 믿음, 두려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옛사람이 힘이 약해져야지만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 발휘될 수 있으며, 예수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인으로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두려워하는 인생의 여정,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능력과 경험이 아무 소용없음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를 때, 이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조금씩 자라가게 됩니다. 내 인생의 주인처럼 살던 내가 그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고백하는 자리에 설 때, 이 믿음을 가진 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나요?
3. 예수님의 ‘나다’라는 자기 계시로 증거하셨습니다. vv.20-21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평범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마치 자기가 예수님임을 알려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왜 두려워했나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고 더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포기하고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나다’라는 ‘에고 에이미’는 구약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번역한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스스로 있는 자’, ‘I AM’이라고 현재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현재로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존재하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내니’가 ‘I AM’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대문자로 씁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6)
여기서도 예수가 누구라고 하니, ‘I AM’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집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능력입니다. 영광의 이름만 나타나도 죄인들이 엎드러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니,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이번에는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바람과 바다가 제자들을 죽이려고 몰려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특별한 목적으로 허락하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위협하려고 한 것이 아닌 훈련 프로그램이었던 것입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컴퓨터 안에서 상황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돌려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쩌면 하나님의 시뮬레이션 가운데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람, 파도가 마치 우리를 시뮬레이션 가운데 집어넣으시고 거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시는 과정으로 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두 번째 폭풍우를 경험하니 이렇게 변화됩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3)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몰랐던 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며 경배합니다. 이것을 보며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바람과 파도로 말미암는 상황이 꼭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은 내가 통제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의 교회가 이렇게 될지 알았다면, 예전에 건물이 허물리게 되고 이전을 해야 했을 때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서러움의 근원 안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길바닥에 나앉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인생을 통제할 수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돈을 쌓아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따라 가는 것이 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을 내 맘대로 하고자 하는 근원을 폭로당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세상을 짓밟는 왕이시며, 그 분이 나와 성령으로 함께 하며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는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과 내 인생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이것마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 그 분의 손에 달려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