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이 본문은 지난 번에 설교했던 같은 본문입니다. 지난번에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다를 걸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이야기한 ‘바다’, 성도를 위협하는 세상을 짓밟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제자를 구하러 오셨는데, 제자들을 지나가려 하신 이유는 구약 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죄인인 사람을 하나님이 직접 만나실 수 없어 하나님이 지나가시려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구약의 하나님임을 보여주며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안에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 큰 오해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반대편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위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과 많은 사람들을 대적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입니다. 왜 오해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지만, 세상 사람을 대상으로 혼내시고 싸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 편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와 싸우십니다. 같은 편이 목적이 동일할 때만 같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함께 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아주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같이 사는 사람과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지 않는 문제, 서로의 죄악, 분노, 미움의 충돌 등의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 선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불완전함이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다 가운데 제자들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다에서 성도들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시나요?
1. 잘못된 욕망입니다. vv.16-17
제자들이 바다로 들어가기 전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남자만 5천명,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2만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것입니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좋은 기회 아닌가요? 세상에서 예수를 배척하는 것보다, 임금으로 서셔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왜 예수님은 떠나신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된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적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대상을 나의 욕망을 채워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물질 가운데 돈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또한, 가장 일반적인 우상이 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돈 많은 사람이 세상 가운데 큰 부러움을 받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으로 바라보는 대상을 통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하며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욕망을 해결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와 관계를 이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저의 친구 가운데도 아내가 남편을 돈 벌어다주는 사람으로 대하여, 이혼을 깊이 고민한 친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많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신다면, 건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의 육적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는 영생을 행복하게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영생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안다’는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 듯이 친밀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어떤 대상이든 힘이 있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그냥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방학 때는 부흥회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작은 선물을 사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저를 향해 달려올 때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며칠 떨어졌다가 돌아오면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준비한 선물을 주면 더욱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아빠를 보는 것보다 선물을 가지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한 번도 선물을 사서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으면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오래 믿게 되면, 이제 우리가 선물이 아닌 하나님에게 반응하길 원하십니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결국은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짜 이유는 사라져버릴 것이 조금은 부족해도 하나님만으로 말미암는 행복과 기쁨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은 것입니다.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가야하는 상황입니다. 혼자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만 바다로 보내십니다. 같이 가는 것이 좋아보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대중을 바꾸고자 하신 것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들을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변화와 배움의 장소인 바다로 그들을 홀로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쩌면 대중보다 더 큰 욕망을 가졌던 이들일지 모릅니다. 예수를 따르면서 권력을 얻고자 한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욕망이 가득한 것을 그들의 간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5, 37)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큰 일이 일어날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원하는 것이 좌 우편, 권력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언제 하였나요?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4)
내가 올라가서 매 맞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나니, 침묵이 흐르자 권력을 잡은 후 자신들에게도 권력을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큰 자는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은 열혈남이었기에 별명이 우레의 자식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떠했나요?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막 10:41)
왜 화를 낸 것일까요?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제일 먼저 화냈을 것 같습니다. 다 똑같은 것을 열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물질적 욕망만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자신들에게 더 큰 권력을 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물질을 넘어서, 권력을 쥐는 것입니다. 권력욕이 인간의 가장 깊은 죄성을 충족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큰 권력을 가지면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시킬 수 있고, 공격을 방어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풍요하지 않거나 권력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너무 많은 욕망이 꿈틀거리며 다른 사람과 하나님마저도 나의 욕망을 채워줄 분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세상에서 쇠사슬에 매인 고통을 받는 이유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욕심입니다. 욕심이 내가 원하는 것만 열망하게 하며, 인생 가운데 갈등과 어려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시 107:12)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셔도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힘들어야만 고통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좌절되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 공간이 바다입니다.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시 107:25-27)
하나님이 바다라는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움직이셔서 영혼이 녹아버리도록 하십니다. 왜 영혼이 녹아야 할까요? 그 중심에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가득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 107:28-29)
바다에서 흔들려 본 사람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다양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욕구 불만이 가득하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살려만 주셔도 감사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겸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바다로 초대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열망하며 생긴 교만한 마음을 깨트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돌아볼 때, 바다로 간 적이 없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바다를 많이 다녀온 것 같다고 하신다면,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모든 더러운 것들을 토해내시고 예수가 주시는 생명으로 만족하고 숨만 쉬면서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바다에서 성도들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시나요?
2. 두려움입니다. vv.18-21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깜깜한 바다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보고 제자들을 두려워 죽을 뻔합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 14:26)
귀신인 줄 안 것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고기 잡던 어부들입니다. 이 정도 폭풍우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소스라치게 놀란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이런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고통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자체가 내가 세상에서 내 힘으로 살아가려는 죄성에서 발현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두렵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 두려움을 이기려고 용기를 내라고 말합니다. 용기를 낸 결과는 이것입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28-30)
대단한 용기인 것 같습니다. 폭풍우가 치는데, 베드로가 용기를 냅니다. 용기를 내어 걸어갔더니, 바람이 무서워 빠져갑니다. 용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내 힘으로 파도를 이기려고 하지만, 더 큰 파도가 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생의 파도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내면에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그 때부터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미래로 인해 불안해합니다. 예측하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찾아오면 우리는 비정상적인 반응을 합니다. 환경을 통제하려고 하고, 집착하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못 쓰게 됩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통제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불안감이 커지게 됩니다. 내가 환경을 통제하고 싶어도 통제할 수 없어지면 우리 내면의 불안이 상대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불안장애, 공황장애의 병입니다. 결국 두려움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다 파괴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자를 향해 야단치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 예수를 불렀더니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를 이렇게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 늘 불안한 존재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임을 믿을 때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0-51)
이전에는 바람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지도 않으시고 잠잠케 하시는 것을 보며, 예수를 향해 놀랍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경외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 분인지를 믿었기에 그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돈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생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풍파를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도를 이길 유일한 길이 이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잘 될 거야라는 믿음,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 확신을 내려놓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참된 구세주가 되시며 통치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저의 인생 내내 저를 힘들게 하는 수많은 폭풍우가 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다가 아팠을 때, 움직이지 못했을 때도 매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집이 망해서 지하방에 살 때도,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고통하며 힘들 때도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했습니다. 이 교회를 개척하기 바로 전에 가장 큰 폭풍이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하면서부터가 폭풍우의 시작이었습니다. 44살에 백수라는 현실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괴롭히지는 않지만, 제 영혼 안에서는 파도가 제 영혼을 흔들고 몰아쳐서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2년을 살면서, 이 전에 받았던 은혜까지 의심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안양천을 걷기 시작하는데, 그 불안감이 저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찬양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안양천 육교 위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라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서 2장으로 만든 찬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듣기 원하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바위틈 은밀한 곳에서 듣기 원하네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바위 틈 은밀한 곳에 숨어있는 자에게 왜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일까요?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사랑하는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며 내 손을 잡고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육교 난간을 붙잡고 엉엉 울며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제가 불안하고 두려웠던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였습니다. 제가 원하는 안정과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내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막히는 것 같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포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이 보고 계시며, 즉시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워주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바라보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바다와 같은 인생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바다같은 인생에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바다에서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여 평생 예수를 찬양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