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여러분이 만일 어떤 일을 하는데, 그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와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들 선뜻 그 일을 함께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문가와 하면 자기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의 최고의 사람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이유가 자신의 위상이 올라가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배움의 마음만 있는 사람이라면, 탁월한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을 통해 엄청난 성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잘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다가도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면, 그 전문가의 솜씨로 부족함과 연약함이 가려지고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나 혼자 하는 것보다 탁월한 전문가의 손길을 통해 영광도 얻을 수 있고 성장도 하며, 더 완성도 높은 결과도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문가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며, 모든 것의 완전한 결국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신데, 어떤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과 어떤 일을 함께 하게 된다면, 영광, 성장, 완벽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특별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나요?
1. 예수님을 바르게 찾는 자들입니다. vv.22-27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이 부분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갈릴리 바다 가운데 폭풍 속에서 제자를 건지신 것과 연결된 본문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홀로 산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폭풍 속에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무리들은 가버나움이라는 곳까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갈릴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시자, 예수님께서 도시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먼 곳까지 예수님을 찾아 열심히 온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님에게 극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며, 예수님이 이곳에 오시자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떠나고자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5)
이들을 떠나신 이유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맘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한 것입니다. 영적 짝사랑의 상황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며 예수님께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은 그들이 싫어서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정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표명한 무리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시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2:23-24b)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의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같은 단어입니다. 번역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짝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믿었는데,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셨나요?
“[24b] …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b-25)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오고 예수님께 관심을 보였는지를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감추는 일에 익숙합니다.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어른들은 아닙니다. 잘 감춥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에 대해 좋고 싫고의 마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품고 상대방을 통해 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이기적 마음을 감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관계를 맺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속을 보니, 그들이 열광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기적을 경험하고자 한 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어쩌면 끝까지 이기적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할 때, 그들이 선택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순수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타락하고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데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른다면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가 나중에 공부를 잘하고 유명해져서, 아이를 통해서 명성을 얻고 싶어 한다면, 그 자녀가 부모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부모는 분노하게 됩니다.
10여년 전에 고등학생 아이가 엄마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체에 냄새가 나자, 문에 본드를 발라 몇 달을 시체와 함께 지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엄마를 왜 죽였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아이를 탄원해 달라는 탄원서를 많이 보냈습니다. 이 엄마가 아이를 유명한 사람을 만들고자 아이를 폭행한 것입니다. 문제 하나를 틀릴 때마다 골프채로 10대씩 때린 것입니다. 엄마의 만족을 위해 성적표를 위조하다, 들킬 때가 되니 엄마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으로 누군가를 대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베푼다고 하지만, 잘못된 욕구를 기반으로 한다면 누군가가 나의 만족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분노하며 관계를 깨트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합니다. 결혼할 때 결혼을 통해 행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결혼 후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욕구,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기란 힘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들이 무엇을 알았어야 했나요?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가 육적 욕망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병이 낫고, 성공한다고 생각하여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시작점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도 하나님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물질주의에 점점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돈이 이렇게 모든 사람의 절대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중학생도 요즘은 건물주가 꿈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건물주가 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인간의 영혼은 물질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우울증 환자가 있는 곳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있는 곳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부자처럼 보이지만, 그곳에 우울증 환자가 많은 이유는 물질이 풍요를 가지고 올 순 있지만 인간은 그 물질로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기 위해 오셔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멋진 삶을 살아도 인간의 영혼 안에 공허감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어서 영적 공허감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욕망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아무리 많이 먹고 가져도 영적 가난함을 경험합니다. 죄 때문에 공허하여 계속하여 두려워, 나만의 성을 쌓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가난하고 아플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부자일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 믿는 것과 외적 환경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두려움을 주는 근원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경험함으로, 예수님이 진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행복하면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혼자가면 할 수 없는 것들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다녀오는 것이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온전한 관계 가운데 진짜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27a]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
점점 사람들인 썩을 양식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양식이 너무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4-50년 전에는 썩을 양식이라고 해도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남들과 훨씬 다른 수준에서 좋은 것들을 누립니다. 그 수준이 너무 높아진 것입니다. 은밀하게 소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누리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끊임없이 이것을 자랑합니다. 인간은 눈으로 보는 것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는 자들입니다. 보기 전에는 갖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sns에서 계속 올라오니 갖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비싸고 소수만 쓰고 싶은 것일 때,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입장벽이 높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모두가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방에 관심은 없지만,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관심 있는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썩을 양식이 좋아 보이는 것처럼 유혹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영적 갈망과 관심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다양하게 영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말씀에 은혜를 받고자 애썼습니다. 이 가운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하진 않지만 주중에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이 유튜브, 넷플릭스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혼의 공허함을 짜릿한 만족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20대의 80%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의 영향력입니다. 이들이 관심 갖는 모든 것은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것들입니다. 물질적 풍요가 사람들에게 영적 파괴와 영적 공허를 더 많이 가져오게 합니다. 인간은 물질이라는 것이 한계효용의 법칙에 도달하게 됩니다. 좋은 것을 아무리 가져도 그것으로 얻는 만족이 이전과 같이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뷔페만 가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첫 접시가 제일 맛있는 법입니다. 배불러지면 만족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의 장자만 죽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며 매일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만족하였나요? 성경은 만나를 천사들의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이것을 주었더니, 만나라고 부르는 데서부터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만나의 뜻은 ‘이게 뭐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나가 된 것입니다. 먹고 배불렀는데, 왜 고기를 주지 않냐며 원망을 한 것입니다. 고기를 주셨더니, 향신료를 달라고 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존재가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물질적인 것을 안 주시고 영적인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물질도 주실 수 있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질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적 변화를 위한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관계, 우리의 삶, 우리의 모든 것이 그 여정을 통해 우리가 죽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하며 성장하여서 욕망과 두려움에 매여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7b]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생명의 양식을 경험한 자들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의미있다고 하는 것은 온전한 가치, 온전한 권위가 있는 분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내가 좋다고 하는 것이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바르게 찾아야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로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나요?
2.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vv.28-29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일에 이들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냐는 질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동문서답 같지만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노력하고 애써서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멋지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며, 어둠에 빛을 가져오며,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하며, 생명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영혼이 공허한 자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랑을 쏟아 부어도 사랑에 갈급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하고 애를 써도 욕망과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을 벗어나게 할 순 없습니다. 저 역시 저의 욕망을 이기는 것이 어려움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 되기 위해선, 사람이 노력하는 것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통해 어떤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의 죄를 벗어나게 하시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온전케 하시는 도구가 될 때, 그 때 거기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을 넘어 교회에서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일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저는 하늘사랑교회를 지난 7년간 목회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은혜인가를 경험하였습니다.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하늘사랑교회가 경험한 하나님의 일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저의 능력과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에도 크리스마스 헌금을 화순에 있는 시골 교회에 보내 차를 사드린 일이 있습니다. 이때는 저희가 이전하기 바로 전이라 돈을 모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헌금을 한 화순교회 목사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드렸고,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이며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한 달 전에 차를 폐차한 후, 금식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동차가 없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달 간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낙심이 큰 가운데, 교회 문을 닫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 저희가 1700만원이 넘는 돈을 헌금하여 자동차를 사고, 종탑 무너진 것까지 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봄에 두 부부가 차를 몰고 저를 찾아와서는, 포기할 뻔 했는데, 하늘사랑교회 헌금을 통해 다시 헌신을 결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낙심한 사람이 소망을 얻게 되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나는 일, 인내로 섬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여러 차례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며, 함께 복음 위에 서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하늘사랑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