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게는 당연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 예수를 믿는 것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믿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며, 왜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한 일을 경험한 사람이 역사 가운데 한두 명 정도 있다면 예외적인 것이겠지만, 지난 2,000년 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셀 수 없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해를 보고 박해와 죽임을 당하는데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신비한 일에 대한 공통적인 조건과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습니다. v.41-44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하늘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니 수군거린 것이 당연합니다. ‘수군거리다’라는 것은 조용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는 ‘원망하다’, ‘비난하다’, ‘불평하다’로 번역됩니다. 내면에서 불평이 가득한 채로 예수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너무 명확했습니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부모가 누군지 다 아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곳은 고향 나사렛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지식에 대한 확신이 강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정보와 지식이 확실하기에 예수님이 절대로 하늘에서 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자신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면 대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인 사람과 만나면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이런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지식은 ‘영적 무지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를 확인했기에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반쪽자리 확신과 지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세상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듭니다. 사람만 삶의 의미를 찾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신을 향한 영적 반응을 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애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한 후, 살아가는 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은 교만합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며, 더 넓고 크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맹인’이라고 비유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결국 교만한 맹인입니다. 보이지 않으면서 전부 아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를 깨달아야 벗어나려고 애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46] …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6-48)
이 사람은 거지에다가 눈이 안 보이는 날 때부터 맹인인 자입니다. ‘바디매오’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인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디매오에게 간절한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해결받길 원했고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지릅니다.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예수가 아니면 이 절대적인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자기인식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물으십니다.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1-52)
예수님이 질문을 하는 것은 이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은 예수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맹인이며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다. 마가복음 10장을 보시면, 이 사건에 등장하기 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똑같은 질문인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맹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이 열리는 것은 육적인 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서 교만한 상태에서 구원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보고 경험하고 그 가운데 성공까지 해서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맹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자신이 보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본다’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보지 못해 심판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처럼 자신이 맹인임을 깨닫고 어두움과 연약함을 인정하여 예수님을 찾는 자를 예수가 눈을 뜨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자들에게 불평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은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보고 확신한 것을 근거해 하나님의 일을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주인이며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교만한 맹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빛이고 참인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러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예수께 오시게 하는 것에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요?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은혜의 자리, 겸손하게 만드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 자신이 맞고 경험한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자리로부터 이것이 틀렸구나라는 자리로 내려오지 못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성경에도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예수님을 핍박한 한 사람, 바울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찾아 감옥에 가두며 이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바울의 눈을 하나님이 멀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눈이 먼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눈이 먼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것 자신이 한 일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진 상황이기에 자기 죽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이끄는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상황과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지날 때는 고통과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이고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교회의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는데, 오랜 시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그 권사님은 80세 정도였으니,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가셨을 것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을 믿게 된 간증을 하셨는데, 일제 시대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어린나이에 시집을 가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는데, 병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와 앉은뱅이가 된 것입니다. 위의 손은 멀쩡하지만 앉은뱅이가 되자, 난리가 나서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다고 하십니다. 치료를 받아도 해결되지 않은 병을 어린 나이에 얻으셨습니다. 어느 날 밖에 사람들이 시끌벅적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서 어떤 일인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읍내에 목사님이 오셔서 병자가 낫고 기적이 일어나서 구경 가는 중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가고자 했지만 혼자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읍내까지 기어서 갔다고 합니다.
가보니 사람들이 읍내에 모여 서 있고, 앞에서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 기어서 목사님 앞에까지 갔다고 합니다. 가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데, 목사님을 붙잡으며 낫게 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자신은 낫게 할 힘이 없지만, 예수님이 낫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답니다. 예수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점점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고 나으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믿으며, 자기 남편을 전도하고 시댁을 전도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다니셨다고 합니다. 이분은 앉은뱅이가 되지 않았다면 귀신을 섬기며 살다 죽었을텐데, 그 일이 자신과 가족을 구원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하나님이 이런 역사들을 행하시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땐 이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의존을 내려놓고 다른 길, 예수님이 주시는 길을 의존하는 데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은 우리를 교만의 자리에서 내리시고 맹인된 자를 보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께 듣고 배웁니다. vv.45-46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이 아무나 다 와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고 배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 직접 말씀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기에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배웠다는 것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내신 선지자들과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전파하는 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통해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고 예수님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해, 말씀을 통해 예수를 믿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보낼 것을 약속하시며, 그가 오시면 그를 믿고 의존하여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옮겨 적을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정성스레 쓰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구원자가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읽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시기 위해 글로바라는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십니다.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5-16)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육체로 오셨는데, 일부러 그들이 성경은 맹인이 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이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그의 죽으심으로 낙심했는데 그의 부활소식이 들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 27)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쓴 것을 듣고도 모르냐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렇게 자기에 관한 것을 가르치셨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눅 25:30-31)
이제야 눈이 떠졌습니다. 말씀을 들어 성경이 예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고 나니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일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육적인 눈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성경을 통해 예수를 알아가게 되어 우리 마음이 예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 눈은 이렇게 어두워진 것일까요? 마귀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창 3:5)
여기서 눈이 밝아진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육적 눈이 떠지고 영적 눈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죄악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육적 눈은 밝습니다. 하루 종일 육적 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익을 얻고, 쾌락을 얻고, 재미를 얻는 일만을 육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삽니다. 자기 이익과 자기 영광을 추구합니다. 정보를 가지면 가질수록 확신을 가지고 그 기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 인생 가운데 만들어 둔 저주입니다.
동네에서 농구를 좀 잘한다고 생각하여 농구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생각해본다면, 동네에서 잘하는 것으로 명함을 내밀 수는 없습니다. 그 세계에 들어가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이 중요한 것 같아서 관심을 가져도, 돈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내가 가진 것 정도로는 견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열등감을 가집니다.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내 안에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은 있지만 현실을 마주하며 좌절하고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자 하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면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영적 눈이 열려야 이렇게 잘못된 것에 의존하는 육적 눈이 닫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과 은혜를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눈이 열리길 원하시고,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말씀으로 예수를 발견하여 이 땅의 것이 허망함을 경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 가운데 명확하게 인지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에서 중요한 것들을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예수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금 한국 교회 기독교가 전파된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신비한 일로 예수를 믿는 자리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기독교가 시작된 것이 신비와 기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기적적 역사가 강해졌던 적이 있었지만, 한국 기독교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세워졌습니다. 1866년 제너럴 셔면호가 평양에 들어와서 조선의 관군과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침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의 물이 줄어들어 멈추게 되었고, 셔먼호가 불에 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 토마스 선교사가 있었는데, 런던 선교회에서 파송받은 27살의 청년이었습니다. 땅으로 내려가 관군에게 찔려 죽임을 당하는데, 자신을 죽인 자에게 성경을 주었고 성경을 땅에 뿌리고 죽었습니다. 그때 최치량이라는 12살짜리 꼬마가 구경 왔다가 3권의 성경책을 주웠고 집에 가져갔다가, 박영식이라는 사람에게 성경을 주게 됩니다. 박영식이 성경을 보니, 종이질이 좋아 성경을 다 뜯어 자기 벽지로 바릅니다. 그 후 집 안에서 생활하며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말씀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최치량이 나이가 들어, 박영식이랑 친하게 지내던 중, 박영식의 집을 샀고 그 집을 주막으로 사용했습니다. 마침 그 주막에 한국의 유명한 선교사인 마펫 선교사가 묵었습니다. 그 주막에 성경책이 도배된 것을 보고 최치량에게 물었는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을 때 있었던 일임을 말했더니, 감동하여 최치량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최치량이 섭리 가운데 예수를 믿어 그 집을 교회로 내놓았고 그곳이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습니다. 후일에 이 교회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되어 1907년 평양대부흥이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으면서 뿌린 성경이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찔러 죽인 박충권이라는 포졸 역시 죽으면서까지 선교사가 전해주려고 했던 성경이 궁금하여 성경을 몰래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평양 영주교회의 신자가 됩니다. 이영태라는 조카에게도 성경을 읽게 하였는데, 똑똑한 이영태는 평양 신학교의 레이놀즈 선교사 밑에서 조교를 하며, 구약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도와 한글 성경 젼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이영태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살면서 북한의 공동번역성경을 편역판을 편집하여 내놓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100년 역사는 성경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통해 영적 눈이 열려 예수를 발견하며, 우리의 주인 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