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제자훈련을 같이 하고 수련회도 꼬박꼬박 참석하여 리더로 섬겼고, 선교도 같이 갔던 열심 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쯤, 성경의 이야기가 거짓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 갔을 때, 그 아이의 친구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는데, 그 친구가 교회를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고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 책임인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교회로 돌아올 수 있겠지만, 지금도 안타깝고 마음이 슬픕니다. 한 때 열심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무리들이 아닌, 제자들 가운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실족하여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vv.60-63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서 불평하는 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를 제외한 자들로 예수님의 추종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렵다고 한 이야기가 무엇이었나요? 6장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고 단순한 말씀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육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믿음으로 얻는 것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걸림이 되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걸림이 된다는 것은 걸어가다 넘어져,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려고 해서 제자가 되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걸림이 되다’를 성경은 주로 ‘실족하다’라고 번역합니다. 왜 이 말씀에 실족한 것일까요? 영적으로 쓰여진 말씀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절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것인데, 거듭남의 중요한 증거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이 없이 성경을 접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에 걸림이 되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똑똑하다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오히려 판단하고자 하기에 성경을 이해하기 더 어렵게 됩니다.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이 그래서 다시 있던 곳으로 가실 것인데, 어떻게 할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황에서 놀라운 기적을 본 뒤에 그제야 진짜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기차 떠난 뒤에 손을 흔들어도 소용없다는 속담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진짜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후회해도 소용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 일어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또, 죽기 전에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가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이 땅에서 누리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으로 은혜 받기 원하시는 이유는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이 무익하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삶이 다 부질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가져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나요?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영이고 생명인 이유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늘의 영적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고대인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경은 옛날에 만들어진 여러 책 중에 한 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통해 직접 자신이 생명의 길을 주실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역사상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고대의 사람들이 짜깁기 하여 쓴 책이라고 하는 사람이 늘수록 교회는 쇠퇴했습니다. 마귀는 교회를 어떻게 하면 무너트리고 사람들의 신앙을 무너트릴까 고민하며, 공격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권위를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자유주의적 영향력이 확산되어 신학교에서도 성경을 이성적으로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사야서 같은 경우는 저자가 4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근원적 이유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미리 기록될 수 있느냐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 담겨 있는데, 이런 미래의 일이 기록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에 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이와 같이 말씀에 대한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 성경을 의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설교도 강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인기 있는 설교를 들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듣고 나도 성경에 대해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주어졌고 무슨 의미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보다는 성경이야기를 배경으로 감동적인 스토리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문제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욕망을 자극받고 즐겁게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이야기는 유튜브에 넘쳐납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하지 않아도, 재밌는 강연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권위를 마음에서 잃어버리고 있다면 마음의 중심 가운데 생명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치와 권위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믿음이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한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팔아버리는 일을 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그 분의 말씀을 따를텐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부인하면 믿음이 없는 것에서 떠나, 예수를 반대하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까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마귀가 가룟 유다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의 본질이 마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어떻게 상상하나요? 뿔이 달리고, 삼지창을 들고 얼굴은 붉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형상으로 만들어낸 마귀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마귀의 본질은 마음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마귀와 똑 닮은 자들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마귀와 같다고 하는 부분은 욕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사랑이 없는 존재 이기적 욕심이 가득한 존재가 마귀입니다. 이런 존재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마귀를 살인한 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 중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욕구를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마귀의 세상의 이야기를 세상풍조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늘 듣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좋은 학교에 나와야 행복할 수 있어.’, ‘넌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해’, ‘너의 약점을 보이면 안 돼’ 등의 말입니다. 세상에 살면 너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거짓말인 것입니다. 마귀적인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치려고 하는 분야에 관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사기를 칩니다. 욕심이 있어야 걸려 넘어갑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동생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중학생 형이 호떡을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친절하게 잘해주더니, 자기 집에 가면 움직이는 로봇이 있는데, 다 분해되고 하늘도 날 수 있는 좋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집에 오면 그 로봇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로봇이 동전을 넣어야만 움직인다고 하면서 집에 있는 저금통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가서 저금통을 뒤지는데, 마침 제 저금통은 없고 동생 저금통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지를 못해 동생 저금통만 가지고 가서 형을 주었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버트를 얻고자 하는 욕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자기가 넘어가게 되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통해 우리를 우리의 욕심이 자극 되어 모든 관계가 파괴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있지 못하면 우리는 이야기들 가운데 바른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진리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는 욕망을 자극하여 자기만 알고 살아가고 거짓에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마귀적 존재가 된 구체적 인물이 있습니다.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가룟 유다는 역사 내내 나쁜 사람으로 이름이 불리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 외에 기록된 에피소드는 다음의 내용입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4-6)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행위의 구체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무서운 욕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트린 것을 보면서도, 가룟 유다는 자기의 욕망의 도구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욕망 때문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마귀가 아무 사람에게 가서 생각을 집어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일 똑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을 때, 솔깃합니다. 유튜브 중에 알고리즘이 있는데, 무엇을 하나 보면 계속해서 비슷한 것을 추천해줍니다. 이것이 편향성 강화입니다. 유튜브가 이런 만족을 주지 않으면 많은 시간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계속 추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싫어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편향성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마귀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고, 원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세상을 세상풍조로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각을 흔들고 있다면,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 마저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찾아 듣는다면, 말씀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의 욕구만을 만족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이런 편향성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vv.65-69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결국,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마음이 열려야지만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만 우리는 믿음을 갖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중요한 뜻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백하는 때가 적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꼭 도와주셔야 하는 영역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 누군가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도 가장 놀랍게 깨달은 부분이 이것입니다. 목회시작 전에 저는 제가 열심히 하면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저의 영역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보다 1.5배로 말씀을 빨리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낸다고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고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에 우리를 그 자리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낙심하게 될 때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겠다고 한 자들인데, 실족하여 떠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상 소수에게만 주어진 기회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떠나니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 12명은 교회로 선택된 자를 대표하는데,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것이 바로 참 교회, 참 백성의 반응입니다. 인생 가운데 항상은 아니지만 영생의 말씀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했기에, 실족할 때도 있지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붙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인생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큰 은혜로 처음 경험한 것은 1996년 4월 24일입니다. 그때 저는 몸이 아파 움직이질 못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며 좌절했습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워낙 깨져있어서 성경을 새로 사서 가져갔습니다. 그 날이 4월 24일이었습니다. 그 날, 어떤 책을 성경에서 먼저 읽어야할까 하다가 기도를 하였고, 마음에 예레미야를 읽어야겠다는 감동이 있어서 일단은 예레미야를 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구절 중 예레미야 1장 5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복중에 짖기 전에 너를 알았고, 태중에 구별하여 열방중의 선지자로 불렀노라.” 그때, 그 구절을 보자마자 다시 성경을 닫았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성경구절은 저에게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너무 명확한 구절이라, 이 말씀이 머리에 들어온 후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그 말씀만 있듯이 열방 중에 선지자로 불렀다는 말씀이 저를 붙들고 흔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경험하고 그 다음 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기도원에서 몇 개월을 지내며 성경을 통독하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때 말씀을 읽었더니, 읽기만 하였더니 상황마다 말씀이 떠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불안해졌을 때, 적합한 말씀이 떠올라 말씀이 길이요 진리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후 어려움이 많았지만 말씀의 은혜가 제 인생을 이끌었습니다.
이 말씀을 기도하는 자리 앞에 붙여두었는데 1년째 된 날 1년 전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복중에 짓기 전부터 아셨다고 하는데, 이것이 거짓말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이 엄청난 힘이 있던 게, 의심이 들자마자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1년을 은혜 가운데 말씀과 기도에 힘썼던 제가 의심에 빠지니, 기도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가 저를 부르셨고 밥 먹으러 나갔습니다. 어머니랑 마주앉아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일승아 네가 어떻게 태어난 줄 아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저를 임신하셨을 때, 시집살이가 힘들어 낙태하려고 병원에 가서 수술날짜를 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시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주무셨는데, 새벽에 시아버지가 부모님 방을 두드리셨답니다. 꿈속에서 하늘에서 흰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배를 쓰다듬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태몽이라고 임신했냐고 물어보셔서 제가 낙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의심했던 말씀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이구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귀한 존재임을, 의미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요하든 가난하든, 유명하든 아니든, 인기가 있든 아니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를 불러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이 땅에서 마귀처럼 살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성도로 부름 받은 여러분이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함으로 예수님과 같은 사랑과 희생,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자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