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사람들의 판단은 아주 부정확합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태도, 생각에 따라 정반대로 갈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평가라니요.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것이 피상적이고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피상적으로 평가합니다. 지금이나 과거나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유사합니다. 당시 무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 똑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신앙인 중에 예수님을 위인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무리가 평가하던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의 이런 평가가 부정확한 것일까요? 인간 자체가 외부 대상을 평가하는 감각 기관이 부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식, 정보를 얻을 때 오감을 사용합니다. 사람은 어떤 감각적 자극이 없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감각의 주요 수단은 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사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도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입니다. 말을 하고 있지만 상대방의 태도, 손짓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의존하는 눈은 다른 동물에 비하면 아주 부정확합니다. 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타조랑 비교하면 장님입니다. 타조는 시력검사를 하면 25.0 정도가 나오는데 20km 떨어진 물건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부정확한 감각 기관으로 사람이 평가하기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또한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지식은 단편적이고 부정확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적은 지식만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맞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평가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 불능이라는 점입니다. 죄악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가 영적 반응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적으로 불능상태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판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자기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vv.10-18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초막절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며, 형에게 올라가서 기적을 보이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때가 아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며 중간에 올라가십니다. 중간에 올라가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많은 소문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정된 때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께 달려들면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사람들의 기대감이 고조되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면 그들의 구원자라고 외치는 장면이 벌어졌을 것이고 이것에 놀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중간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글도 모르시는데 글을 혼자 깨우쳐서 읽으신 것에 놀란 것처럼 되어 있지만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당시에 유대인 남자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서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신 내용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되려면 랍비 밑에서 배워서, 유명 랍비의 제자라는 칭호를 가져야했기 때문입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서기관들은 성경 연구를 평생 헌신하며 한 사람들입니다. 신학대학교 교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늘 이야기하는 판에 박힌 소리가 아니라, 새롭고 영향력 있는 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 놀라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당시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해석에 대해 어느 랍비가 했는지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권위로 가르치지 않았고 유명 랍비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용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며 이야기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해 자기가 영광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어떻게 되었나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선악과로 인해 인간은 자기를 높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합니다. 자기 영광을 높이는 모든 사람의 행동입니다. 종교지도자,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본질 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어떤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근원 안에 자기를 높여 내가 다른 존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 말과 행동 모두 자기 영광을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말하는 사람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환호를 받을 말을 합니다. 죄를 쉽게 해결받는 방법을 카톨릭은 가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해결받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쉬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고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나의 영광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나의 영광의 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눅 11:43)
‘화 있을진저’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살아가는 나쁜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명하십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독사라는 것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이들의 열심의 본질이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의 본질은 자기 내면 안의 더러운 것이 폭로될까봐 겉을 더 아름답게 감추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차를 타며 자신이 멋진 모습을 보이고자 애씁니다. 종교인들은 종교적으로 더 괜찮은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본질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인생 내내 악한 영향력을 미치며 다른 사람까지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보며,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 안에 종교성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좌절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때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를 가장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본질입니다. 종교적만이 아니라, 우리 본질은 하나님을 동원해 나를 높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내 영광을 높여주지 않고 나의 영광이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끝나면 하나님께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믿을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본 시작은 나를 위해 시작합니다. 참 성도라면 그 과정 가운데 나의 영광, 나의 기대가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인정하며 이 땅에서 낮아지고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도 저희 집이 대학생 때 망했을 때, 가장 화났던 이유가 하나님이 부모님의 열심을 받아주시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으면서 부모님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니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도가 나니, 하나님께 원망하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참 신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도구로 삼고자 한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임을 인정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잘못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vv.19-24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십계명의 제 육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인데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해 종교지도자들이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요?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할례, 지금으로 말하면 포경수술은 난지 8일 만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이 겹쳐도 이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충돌하더라도 더 중요하다 생각해서 지킨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안식일에 행한 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이 지금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종교지도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일을 하는지 안하는지를 체크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원칙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법에 따라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렇게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본적인 원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38년이나 매여있던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고통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며 불의하게 판단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사랑의 법 안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공의가 언제 흔들리나요? 자기의 이익이 결부되기 시작하면 불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자기 이익이 걸리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불의합니다. 죄악이 가져온 영적 불능 상태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끝이 없이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풍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돈이 정말 없을 때, 통장에 1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 돈이 이제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기대치가 점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늘 문제를 일으킵니다.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사랑의 법으로 주신 율법 마저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재료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끊임없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취해서 더 부자가 되고자하는 인간들에게 멈추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은 나의 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 마저도 자기의 죄성과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높이는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계명만 세부 조항이 수백 가지로 늘어났습니다. 남들과 차별화 지으며 자기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지키는 사람은 자기 의를 쌓고 어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죽이고자 합니다.
혹시 누군가를 판단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그 상대가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 판단,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려 부르셨는데, 매일 판단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열망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라고 만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에서나 나는 잘 알고 있고, 내가 정답이라는 바리새인이라는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심지어 상대를 심판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불의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