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세상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과는 관계를 맺는 것이 불편합니다. 왜일까요? 교만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절대로 바꾸지 않고, 객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도 자신이 맹신하는 것을 끝까지 이루고자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기준에 가치 있는 것들을 갖지 못한 사람은 멸시합니다. 교만은 자기 우월감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모든 관계를 깨트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바로 영적 결과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했기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다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세상적 교만함 때문입니다. vv.40-44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예수님이 ‘나를 믿어야 산다,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을 전하시자 백성 중 몇몇은 예수님이 구약이 말씀하시던 ‘그 선지자’인가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 이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동을 받거나 은혜를 받을 때마다 예수님이 ‘그 선지자’일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 선지자는 바로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세를 구약의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고, 임재를 보이셨고, 광야 가운데 그들을 보호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임종 전에, 나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오시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를 기대한 것입니다. 모세의 이후에 모세와 같은 강력한 영적 권세와 영향력을 가진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엘리사, 엘리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세가 가졌던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를 대행했을 뿐입니다. 모세는 능력으로나 말씀으로나 하나님의 권세를 보여준 놀라운 선지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을 압제로부터 구원할 그 선지자를 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도 가르치시고 기적도 베푸시니, 이 분이 바로 그 선지자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기대하기 시작했을까요?
[41a]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사람들은 당시에 ‘그 선지자’와 그리스도를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메시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에 이 그리스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내내 하나님께서 앞으로 메시아를 보내셔서 어그러진 것들을 온전하게 만들고서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가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메시아의 모형인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리스도를 이렇게 기대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단이라고 여기던 사마리아 종교를 믿고 있던 여인조차도 메시아가 언젠가 오실 것이고, 그 분이 오시면 모든 문제에 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그 선지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주 긍정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이 말씀하던 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그 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믿고,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가로막는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41b]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사람들이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는 굉장히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오가는데, 한 사람이 ‘그 사람 별거 아니다, 알고 보면 시덥잖다’고 얘기하면 기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나 메시아로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왜 그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을까요? 세상적 교만의 근거가 되는 세상의 힘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겠느냐?' 왜 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갈릴리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의 촌구석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요충지에서 사람들을 통치할 위대한 자가 나올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갈릴리, 특히 예수님이 사셨던 나사렛은 아마 지금도 몇 십 명 정도 사는 촌마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단편적이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오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요. 바로 이런 세상적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그렇게 판단하나요? 자신과 다른 사람도 이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구세주’라고 했을 때, 일차적으로 나를 이 세상에서 더 강하고 성공하고 멋있게 만들어줄 사람을 기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나 의지할만한 사람을 바라볼 때마다 이 세상적 힘을 기준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나다니엘이라는 사람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
이것이 바로 당시의 사람들이나 우리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세상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잣대 즉 교만의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쉽게 설명하면, 의지하지 말아야 될 것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교만한 태도를 갖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도 돈도 세상의 힘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셨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교만의 본질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 다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는 것으로 더 부유해지고, 더 성공하고, 더 큰 부자가 되고, 하나님마저도 내 유익에 이용하려 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강하고 부유하셔서 나를 도우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이 잘못된 교만을 깨트리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님을 의존할 수 없을 법한 분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비가 많이 오고 땅이 비옥한 곳에서 나무가 자라면 나무가 크게 자랍니다. 아마존 같은 곳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이 크게 자라 온 땅을 푸르게 다 덮습니다. 그런데 땅이 비옥하지도 않고 비도 오지 않으면 나무가 어떻게 될까요? 메마른 가지에, 이파리도 가뭄을 이길 수 있도록 가시 같은 모습으로 자라기 때문에 너무나 볼품이 없습니다. 마치, 저렇게 뒤틀어지고 조그맣고 볼품없는 것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은, 갖다 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을 존재로 예수님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를 부유하고 강하고 영웅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믿고 싶을 텐데,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뜻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얻기 때문에 그를 의존하는 가짜 의존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그 분을 사랑하고 의존하는 진짜 의존을 만들어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누군가 나의 미래를 책임져줄 것 같으며 돈이 많으니 결혼을 한다면 그 결혼이 정말 행복한 결혼일까요. 돈이 관계의 목적이 되는 순간 모든 관계는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풍요가 주어지지 않을 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잘못된 의존을 가진 우리들을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개입하여 구원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과 28절을 보시면,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하나님은 우리가 강하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방법으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왜 우리는 강하고 크고 부유한 것을 좋아할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을 준다고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풍요하다고 무조건 행복하지 않습니다. 풍요하면 당연히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편리가 행복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편리는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잠시는 편리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잠깐입니다.
제 인생 가운데에도 많은 불편한 과정들을 지나갔습니다. 인생이 언제 불편해질까요? 돈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돈이 없으면 환경과 삶의 모든 부분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 불편함이 저를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그 불편함을 통해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던 습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본질을 배우게 되었더니 환경적 불편이나 결핍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본질 안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풍요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눈에 보이는 풍요와 편리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을 채울 때에 행복해지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것만 주시고 우리의 다른 영역에는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저도 하나님이 얼마나 제 인생의 사소한 것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지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지금이야 월급도 받고 안정적이 되었지만, 저의 20대부터 40대까지 거의 20년 동안에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계속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저의 고민은 하나님이 이렇게 부유하시고 능력자이신데 왜 내 인생을 넉넉하게 채워주시지 않으시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제가 은혜 받았던 것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20대 때, 어떤 날은 설교를 듣는 카세트가 고장나버렸습니다. 카세트를 살 몇 만원이 없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꼭 필요합니다. 카세트가 없어서 설교를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설교 들을 카세트 필요합니다. 꼭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 정도 기도하던 중 제가 가르치던 학생의 어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셨습니다. 아들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는 카드와 함께 돈이 있었는데, 정말 카세트를 사기에 정확한 액수였습니다. 그 돈으로 10원도 남기지 않고 카세트를 맞추어서 샀습니다. 이것이 한 번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었습니다.
한 번 비가 오는 날에 신발에 난 구멍으로 물이 다 스며들어서, 학생 집에 도착해도 신발을 벗지 못 했습니다. 왜 안 들어 오냐고 물으시길래 발과 양말이 다 젖었다고 하였더니 새 양말을 주셨습니다. 화장실 가서 씻고 나오니, 평소에 낮에 계시지 않던 아저씨께서 마침 잘 되었다며 구두 티켓을 주셨습니다. 제가 무슨 구두를 샀을까요? 절대로 물 안 새는 구두를 달라고 했습니다. 오래전이라 요즘처럼 공기는 통하면서 물은 막아주는 방수구두가 아니라 진짜 방수 구두였습니다. 구두에 바람이 통하지 않아 발에 열이 나서 평소에는 신을 수가 없고 비 오는 날에만 신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눈물 나게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진짜 필요한 것을 이렇게 알고 계시구나. 카세트가 필요하면 카세트를, 구두가 필요하면 구두를 어떤 날은 가방을... 하나님이 내게 정말 이런 것까지 다 주시는 분이구나.'
여러분 그런데 그것이 계속 행복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 카세트와 구두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세트는 엠피쓰리로 바뀌고 방수구두는 닳습니다. 물건이 행복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 뿐 아니라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기억하신다. 하지만, 제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중에 안 주신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다 목적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교만으로 살 뻔 한 자리에서 겸손한 자리로 내려오게 하시고,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것은 주시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내 인생 전체를 통해 개입하셨습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오래 지나지 않았다면. 20년을 찢어지게 가난한 채로 고통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며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이나 풍요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이지요.
눈에 보는 것들을 자꾸 의존하여 마음을 두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기 인생을 평가하고 자기를 높이고 강하게 만들면, 욕심이 개입돼 결국 고통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4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신 8:1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세상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가 주어지면 하나님 말고 세상을 전부로 생각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교만의 자리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인생에 개입하시나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 2:12)'
교만한 자 거만한 자, 자고한 자 다 같은 말입니다. 왜 반복하시나요. 이것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교만, 즉 풍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만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섬기는 은혜를 경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종교적 교만함 때문입니다.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랬더니 46절에 보시면,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이들도 은혜를 받은 것 입니다. 이렇게 말한 분은 한 번도 없었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47절과 48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얘기하나요?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화가 난 것입니다. 너희도 그 말 듣고 미혹됐어? 너희도 그 편이 된 거야?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49절을 보시면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자기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고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데 율법도 모르는 아랫것들이 우리 뜻을 거역하고 있다고 저주를 받은 무리라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저주인데 과연 이 저주를 누가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까.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 시 119:21)"
종교적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에 가득한 자들이 바로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율법을 깨닫고 예수를 만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을 합니다. 50절과 51절입니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사람들이 예수가 율법을 어겨서 잡아 죽여야 한다고 하니 그를 대변한 것입니다. 이야기만 주워듣고 죽이기로 결단한 것이 옳은가 물었더니 그들이 또 52절에서 뭐라고 얘기 하나요?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들은 잘못된 율법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촌에서는 절대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종교와 세속적 교만이 결부된 것입니다. 이것은 샴쌍둥이 같은 무서운 모습이죠. 잘못된 율법의 해석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더니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되는데 병자를 고치셨다고 죽이려고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에 메였던 자들이 참 안식을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안식에 대한 진짜 의미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안식일을 어겼으니 우리가 대신 처벌할 거야’라는 틀에, ‘갈릴리에서 난 자는 절대 선지자가 될 수 없어’라는 세상적 교만이 결부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세속적 종교성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수 십년간 이 잘못된 세속적 종교성의 영향력을 너무나 깊이 받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영원 안에서 하나님을 진짜 의존하는 사랑이 아닌, 내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내가 돈이 많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는 외적인 풍요만을 열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이지요. 부처님 믿는 사람이 영혼의 자유를 위해 부처님을 믿나요?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관악산에 눈이 서서히 오기 시작한 11월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연주대 바로 옆에 연주암이라고 조그만 암자가 있습니다. 좁은 길이고 줄이 길었지만 헤치고 나갔습니다. 바위틈 옆에 암자가 얼마나 작은지 강단의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가 수능을 잘 볼 수 있도록 백일동안 매일 산을 타며 몇 시간씩 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것 입니다. 부처님을 섬기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것을 원했던 것, 그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죠. 이것이 바로 세속성입니다. 세상의 풍요와 부유를 율법을 잘 지켜서 얻고자 한 것이죠. 율법주의와 세속적 기복주의가 결부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한국교회가 열심히 지키는 주일성수입니다. 그것이 진리라면 항상, 언제나 지켜야 합니다. 주일성수하기 위해 애썼던 것을 어느 순간 지키지 않는다면 진리에서 떠난 것입니다. 지금은 주일 성수라고 제가 일을 안 하거나 택시를 안 타지는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차에 시동이 안 걸려서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아마 몇 십 년 전 주일날 택시를 탔다면 저는 파면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1960년대에 일어난 일이죠. 한국 교계에 박윤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한국 최초로 신구약 전체의 주석을 쓰셨고 여러 교회를 담임하셨고, 또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박윤선 목사님께서 고신대에서 가르치실 때 그분과 아주 친하던 미국 선교사 스푸너라는 분이 한국에 오셨다 미국으로 귀국하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가 아니라 배로 미국을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금요일 출항이 이틀 연기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 배 출항시간과 주일예배가 겹쳐 빨리 택시를 타고 가서 선교사님을 뵙고 또 택시를 타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택시 타고 배에 올라가서 마지막 인사와 기도를 하려는데 신원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같이 갔던 분들과 기다렸다가 올라가서 보니 주일예배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지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배에서 스푸너 선교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선상 주일예배를 드렸답니다. 눈물로 포옹하고 돌아오셨는데 그만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일에 택시를 타서 돈을 썼고 주일성수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주일 공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신학교에서 파면됐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였습니다. 주일을 열심히 지켜야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일날 돈 쓰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어떤 분이 주일날 어느 집에 가셨다가 하나 밖에 없는 양복을 놓고 오신 거예요. 주일날 아침에 양복을 입어야 하니 아들에게 가서 양복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그 아들이 나만 지옥 보내려 그러냐고 대꾸하였답니다. 이게 잘못된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 잘못된 주일성수는 잘못된 신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이란 내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복을 얻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힘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강퍅합니다. 이런 종교적 교만으로 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고자 하는 잘못된 마음에서부터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 교만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고마움을 가지고 계신가요. 여전히 내가 가진 것으로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자격이 없어,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다른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해라고 교만으로 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이 교만을 내려놓는 만큼 우리는 예수의 은혜를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이 겸손과 온유를 배우시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