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꺾쇠 괄호가 쳐진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까지가 그렇지요. 7장 53절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시작 부분과 8장 11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뒤에 꺾쇠가 있습니다.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1 …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성경에 이런 괄호가 두 군데 있는데 다른 한 곳은 마가복음 16장 9절부터 16장 20절까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앞과 20절 뒤에도 꺾쇠가 있습니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 막 16:20 …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구약성경은 보존이 워낙 잘 되어 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지만 신약성경은 어떤 사본이 더 원본에 가까운가를 후대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두 부분이 어떤 사본에는 등장하고 어떤 사본에는 등장하지 않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어 이 두 부분을 괄호 안에 넣은 것입니다. 오래되고 또 사람들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는 사본에는 이 내용들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없으면 뜻이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도 괄호 부분을 뺀다면 마지막 절이 될 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막 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복음서가 이렇게 끝나 버리면 복음이 아니겠지요. 부활을 경험하고 그 놀라운 은혜로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기록하며 끝나야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끝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근데 왜 어떤 사본에는 이것을 뺐을까요. 아마 성경을 옮겨 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쉬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
원본을 필사하고, 그 사본을 필사하며, 수없이 많은 사본이 존재하는 과정에서 ‘정경’이라는 성경책이 확정되기까지 300년 이상의 긴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많은 사본들 중 어떤 이들이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귀신을 쫓아낸다?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어 올린다? 예수를 믿어도 그런 경험 해 보지 못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 부분을 빼버린 것입니ᅟᅡᆮ.
사실 이 내용들은 성경의 문맥 안에서 파악한다면 아주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는 이제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어둠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몰아내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뱀 같은 마귀를 이기는 권세가 주어지며 어둠과 위협에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반드시 성경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왜 꺾쇠 안에 빠져버리게 된 것일까요? 이것도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빼버려서 그렇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11]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간음이라는 죄를 ‘용서해 줄 테니까 가라’는 말씀이 마치, 어떤 죄에 대해서는 형벌을 치루지 않아도 된다고 해석될까봐 이 부분을 점차 빼고 옮겨 적자 어떤 사본에 이 내용들이 들어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초대 교회나 고대에 간음은 가장 흉악하고 무서운 죄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자들이 자기 불성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용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요한복음에서 없애 버렸다.” 즉, 어거스틴도 이 부분은 반드시 요한복음에 필요한 것인데, ‘예수님이 간음을 용서하시는데 이게 무슨 큰 죄냐’라고 오해하는 무리를 두려워하여 필사가들 중에 이 부분을 옮겨 적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든 자기 유익을 위해 왜곡하는 인간의 패턴 때문에 하나님 말씀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 말씀처럼 빠지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가운데는 인간의 무서운 죄악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즉 복음의 정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죄악은 무엇인가요?
심판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vv.2-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무서운 죄악과 또 그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죄악은 무엇인가요? 심판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초막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저 분 혹시 메시아 아니야? 구약이 약속한 그 선지자 아니야?’라고 하며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심히 불편한 상황입니다. 기회를 잡아서 어떻게든 저 인간을 무너뜨려야 되는데, 심부름 보낸 하인들마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감동하니 그를 함부로 잡아끌고 오지 못하고, 얼마나 고민이 됐을까요? 예수님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가는 자기들의 입지가 다 무너지게 되자 고민을 거듭하여 놀라운 꾀를 낸 것입니다. 바로 음행 중에 잡힌 여자라는 덫을 친 것입니다.
본문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을 공격하는 무리는 바리새인들로만 나왔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서기관들도 힘을 합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핵심인물이 바리새인이었다고 ‘바리새인’들만을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요한복음 중 유일하게 바리새인이 서기관들과 함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의 지혜를 빌어 예수님을 공격하였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4절입니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간음의 현장에서 누구를 잡아 오다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간음 행위일수록 더 은밀하고 몰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간음을 혼자 합니까? 간음을 했다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되는데 지금 여자만 데리고 왔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상황들을 셋업한 뒤에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끌고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증거 중의 하나가 또 5절입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구약의 율법은 간음에 대해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라고는 하지만 꼭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돌로 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바로 신명기 22장 23, 24절을 보시면
신 22:23-24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여러 조건이 성립해야 합니다. 첫 번째 이 여자가 지금 정혼을 해서, 결혼한 것처럼 취급 받는 약혼 상태여야 합니다. 정혼하지 않은 처녀를 욕보이는 것은 간음죄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고대에는 처녀를 강간을 했다면 그 여자를 아내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건에 맞으려면 이미 약혼한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성 안에서 이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많은데 여자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강간이 아니라 상호가 동의한 간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어야 이것이 심각한 범죄임이 증명되어 그 때 돌로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당시 여자들은 13-15세쯤에 약혼을 하고 1년 정도의 숙려기간을 거쳐 결혼을 했습니다. 아직 결혼 전인 약혼한 여자니 나이가 많아 봤자 열다섯, 지금의 중3 정도 되는 소녀였을 것입니다. 이런 소녀가 간음이라니요. 그것도 현장에서 잡히다니요. 이것은 상황적으로 유추가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이 초막절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초막절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힘들게 금욕적으로 일주일을 삽니다. 나뭇가지랑 천으로 텐트를 얼기설기 지어서 일주일을 지내야 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이 되면 큰 대야에 물을 담은 뒤 그 물을 제단에 붓고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과 함께 성전을 돌며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간구하며 거기서 기도를 하고 그 이후에 밤새 축제가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축제들은 이런 금욕적인 시간을 지난 뒤 그것을 해방하는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초막절이 끝나는 밤에 밤새도록 춤을 추고 기뻐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엄청난 환희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 이 젊은 소녀도 축제에 참여했다가 한 남자의 꼬임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남자가 어떤 남자였을 가능성이 높은가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돈을 주고 ‘한 약혼한 여자와 간음하는 현장을 우리가 잡을 테니’ 협조하라고 판을 짰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현장을 덮쳐서 남자는 풀어주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겁에 질린 소녀를 잡아 예수께 끌고 온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던 이유를 성경은 6절 상반절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6a]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님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망신 준 뒤에 법적으로도 처벌할 수 있을까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민하고 생각하고 계획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고발을 하려는 것인가요? 율법에 따라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습니다. 여자는 약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있습니다. 성읍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소리 질렀으면 무죄입니다. 근데 하필 성읍 안, 간음 현장에서 잡혀, 여자가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했음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무슨 결과가 나타날까요? 살인교사죄로 로마 법정에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군가를 함부로 돌로 칠 수 없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가 모든 치안을 다스리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죽이지 못하고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사형 언도를 얻어내야만 죽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간음한 자라도 함부로 죽였다가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대로 치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겁에 질려 떠는 소녀가 불쌍하니 용서해 주라고 하신다면요? 그렇다면 바로 산헤드린 법정에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70명의 장로들이 모여 하나님의 율법의 거역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판별하는 종교법정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거부한다면 예수님은 신성 모독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쪽으로라도 실수하시면 달려들어서 이 가짜를 봐라! 하며 선동할 살기로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 6절 하반절입니다.
[6b] …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갑자기 쪼그려 앉으시더니 땅에다가 글씨를 쓰십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8절에 보시면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많은 사람들이 역사 내내 너무 궁금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쓰셨을까? 수없이 많은 이론들이 있었습니다. ‘이 나쁜 놈들아’라고 쓰셨다고도 하고 또 예수님이 앞으로 하신 말씀을 미리 쓰셨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이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보이기 위해 구약의 하나님이 하신 모습과 같은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직접 글씨를 쓰신 경우가 두 번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5절부터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출 32:15-16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이 직접 글씨를 쓰셨습니다. 율법은 무엇인가요? 인간은 심판 받을 존재라는 것을 확정짓는 기준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지켜서 복을 받으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율법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는 자만 복을 받고 단 하나의 율법을 한 번이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게 전제 조항입니다. 인간은 율법으로는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가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심판의 기준으로 주신 게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심판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심판의 기준으로 주신 것입니다.
‘모든 자는 죄인이며 모든 자는 심판 받는다’라는 선포가 바로 십계명이며 그것을 하나님이 직접 기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모두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이 이 심판을 피할 유일한 방법인 메시야를 기대할 수 있도록 그래서 “심판을 통한 은혜”를 가르치고자 주신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한 번 더 직접 글을 쓰신 경우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5장 5절입니다.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밖에는 적국의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고 있는데 벨사살 왕은 바벨론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자만과 교만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 성은 정말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 바벨론 성벽 위의 길에서 마차 두 대가 경주를 할 정도로 성벽이 두꺼웠습니다. 그러니까 성벽은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귀족에게 자신이 온 세상을 정복한 왕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여호와의 전의 기물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공중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것들을 해석합니다. 다니엘서 5장 25절에서 28절입니다.
단 5:25-28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판별하니 너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부족한 존재라는 심판의 선고를 바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두 번 쓰신 게 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이심을 지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번개도 치면 두려움을 일으키기 쉬웠겠지만 쪼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시니까 인간들이 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사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너무 은밀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초라하고 아무도 못 알아차리도록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만 알게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