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본문은 예수님의 초막절 강해 가운데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7장, 8장에서 초막절과 관련된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마지막 밤에 촛대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고 노래하는 관제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초막절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적 상황은 출애굽기에 나와 있습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사람들이 보고 죽지 않도록 커튼처럼 영광을 감추신 것입니다. 구름이 그들을 덮고 있으니 낮은 뜨거운 해가 그들을 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불기둥이 있어 밤에 광야의 추운 냉기로부터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받고 인도받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독립을 열망했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하신다면 압제로부터 구원받고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밝힌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12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무엇이다’라는 비유를 일곱 번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떤 모습, 즉 ‘신성’을 갖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6장의 ‘세상의 떡’ 이후 이 곳에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빛’은 요한복음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9장과 12장에 보시면,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반복하신 이유는 그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것과 또한, 빛과 반대되는 세상의 모습도 말씀하십니다. 어둠은 궁극적 죽음을 가져오며, 예수님을 따라 어둠에서 빛으로 나와야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이 무엇이며, 어둠에서 나와 빛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요?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1.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어두움에 대해 강조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경험하신 현장 자체가 어둠이 죽음의 영향력을 확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악한 행위 즉, 살인, 폭력 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둠’은 바리새인들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가장 종교적이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했던 그들 안에 세상의 본질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근원적 이유가 무엇인가요? 5:16절입니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결국 안식일 사건 때문에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 전에도 예수님이 병자도 고치시고,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자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이용해서 자기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정하신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자,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낸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 의는 종교적으로만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소유나 행동으로 존재를 인정받고자 합니다. 이를 세상은 자존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존심은 자존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감은 내가 무엇을 하거나 가진 것과 상관없이 내 존재 자체가 의미있고 사랑받는 자라는 근원적 충만함입니다. 자존심은 남보다 비교 우위에 있고 싶다는 감정입니다. 즉, 내가 남과 다른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보다 나은 존재라는 자기 의와 일맥상통합니다.
세상에서 자존심만 세고 자존감은 낮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요? 남은 무시하고 자기만 중요한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돋보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항상 남보다 탁월한 존재로 살 수 있나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좋아할만한 모습을 위해 과장합니다. 부정적 반응을 견디지 못합니다. 과시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 대상이 하나님이건 사람이건 발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세상의 어두움입니다. 종교인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올 대상을 찾습니다. 성경의 훌륭한 사람이 나오면 자기와 동일시합니다. 교회나 신학교 안에 다윗, 요셉, 요한 등의 이름은 많지만, 야곱이나 사울이라는 이름이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신을 바리새인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바리새인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들을 통해 인간의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평범한 한 두 명의 사람을 들어 인간의 죄성과 어둠을 보여주기는 어려우니 특정한 집단을 정하여 집단적 특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읽는다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모습, 남보다 괜찮은 존재이고 싶은 열망이 모두에게 있기에 바리새인과 동일시해야 하는데, 자기 의가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윤리적 설교가 흔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설교하면서 ‘믿음으로 거부가 되었다’ ‘믿음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 성도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발휘하라’는 것이 윤리적 설교입니다. ‘사울처럼 나쁜 사람은 심판을 당한다’는 설교는 자기 의를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였습니다.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본인을 좋아하는 인물과 동일시하고, 나쁜 사람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잘못 읽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는지, 구원과 개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쁜 인물들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 노릇이 어떻게 극대화되고 표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설교를 듣고 남이 생각나는 경우는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자기 의가 가득한 태도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흠이 있고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의를 버려야 예수님의 의를 의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직시하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의가 얼마나 아름답고 온전한지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누더기와 같은 자기 의를 버리고, 온전한 예수님의 의를 의지할 때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기성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2. 타인을 파괴하는 이기성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자기 의가 가득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존재에게 분노합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아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을 보시면
마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이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사로잡힌 사람들의 사랑 없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기성에 의거해 모든 행동과 결정을 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연애 감정, 내 이익이 충족되는 것, 눈에 좋아 보이는 것, 이것들은 이기적인 반응이자, 욕망의 충족을 위한 반응입니다. 이들은 이익을 가져오지 않을 때 극렬한 반대반응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선에서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어둠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금과 보석이 있고 환경이 좋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국은 하나님과 사람과 사랑으로 연합된 곳입니다. 미움이 없이 서로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만족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서 우리를 그 연합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 분노하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완전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존재한다면,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랑이 가능한지 증명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사랑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그 대상을 용납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부딪히는 사람, 갈등이 있는 사람, 그들을 통해 사랑을 증명하라고 그들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훈련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품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내가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바리새인들처럼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처단해 버리려고 하는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풍성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답해야 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또한 물질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3. 물질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물질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눅 16:13-14 [13]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하나님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하고, 후추와 같은 양념에서도 십일조를 바치던 종교적인 이들이 진짜 좋아한 것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에 돈을 의존합니다. 누구나 지금 가진 것보다 돈이 더 있다면 인생을 계획한 대로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상황을 상상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사랑하는 자인가 알게 되는 경우는, 돈이 많거나 좋은 환경에 놓인 자들을 보며 불편하거나 부러운 마음이 들 때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역시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돈이 없어 불행하다면 이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살면서 누구나 가집니다. 지금 이만큼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의 돈에 대한 의존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를 부추깁니다. 세상은 그것들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행복과 만족을 재단합니다. 돈에 대한 의존이 깊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마태복음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립니다. 다른 말로, 그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의존하는 것을 넘어, 삶의 결정과 인생에,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시듯,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영향력을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노예라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 비참함과 지배의 정도를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당시에 노예가 도망을 쳤다가는 잡아 죽이거나, 이마를 인두로 지집니다. 죽을 때까지 도망치지 못하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란, 영적 측면에서는 돈의 노예가 된 비참한 인생인 것입니다. 이 영적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만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돈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욕망이나 두려움으로 돈에 대해 반응합니다. 욕망이 강한 사람은 돈이 얼마가 있건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합니다. 탕진, 가불, 할부, 지름신, 신상 등의 단어들이 이들을 설명합니다. 매달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은 가성비를 따지고 근검, 절약, 저축을 하기에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인생 내내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돈을 써야 할 때 쓰지 못 하고,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지 못하고, 영적 풍요를 경험하지 못하고 구두쇠로 살다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어두움의 삶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나의 이익과 나의 확장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 가장 종교적이라던 바리새인들에게 현저했던 모습입니다. 우리 또한 바리새인처럼 우리 자신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고, 이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들을 예수님이 초대하십니다. 빛으로 나아오라! 물질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빛으로 오라는 초대를 받아들여 어둠을 벗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