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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06일

    요한복음 강해 46 요 8.21-30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결과

    게시판: 설교문

    2022년 2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예수님을 믿어서 직접적인 이익이 생긴다면 아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 이익이 구체적이고 클수록 그 숫자도 비례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큰 유익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예는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이민이나 유학의 초기 정착에 집과 차, 물건 등을 사는 일을 도와주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맛있는 한식도 먹고 교제 하다 보니,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한인이라는 공동체가 필요해서 출석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직분을 받고 교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 세상의 방식대로 해결하려다 교회 안에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건강을 해치고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예수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지금과 같은 상황,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확대되는 상황이 굉장히 암울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짜 택하신 사람만이 남는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예수 믿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시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군가 교회에 온다면, 예전처럼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닌,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한번 믿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예수님을 뺀다면 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영혼에서 솟구쳐 나오는 어둠이 제 인생을 지배해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비교하며 살다가 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만족, 행복,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누리게 되었고 이것들이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단순히 마음이 기쁘고 행복한 것보다 더욱 크고 중요한 영적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치명적 영적 결과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결과는 무엇인가요?

    1. 죄 가운데 죽습니다. vv.21-24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결과는 바로 죄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2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1a]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


    예수님이 가시고 나면 그제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다음에, ‘이 분이 진짜이셨나?’ 생각하는 사람과 혹은 여전히 예수님의 본질을 감추고 거짓으로 소문내려는 사람들 전부 예수님을 찾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떠나신 다음에 찾는 이들, 즉, 기회를 놓친 이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나요. 21절 하반절입니다.


    [21b] …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들에게 꼭 필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지금 깨달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밀어내고 거부하고 반대하다가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그때는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어지는 결과는 바로 죄 가운데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치명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 이것은 어떠한 형벌보다 무섭고 영구적인 결과라 오늘 본문에서만 똑같은 말씀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24절 말씀을 보시면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성경은 무엇인가 강조할 때 반복합니다. 같은 말씀을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죄 가운데 죽으면 나타날 결과가 21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21c] …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죄가 있는 인간이 절대로 갈 수 없는 곳, 예수님이 가실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예수 믿을 기회를 이 땅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악의 결과이며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갈 수 없다면 죄를 가진 인간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우리는 ‘지옥’을 떠올릴 때 종종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을 떠올립니다. 성경에는 몇몇 이미지들을 통해 지옥이 얼마나 무섭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주 비참한 이유는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숨 쉬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대로, 생명이 채워짐으로 인해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영향력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하기만 하면 인간의 만들어진 최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것이 바로 죽음과 저주가 가득한 상태입니다. 성경이 지옥에 대해 묘사하는 마가복음 9장 48절을 보시면


    막 9:48-49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지옥에 실제 구더기와 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불이 이 정도로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면 아마 구더기도 진즉에 타 버렸을 것입니다. 그림만으로 보자면 모순이지만 이 모순된 이미지로, 고통을 주는 심판의 도구가 있는 지옥, 또한 구더기와 같은 미물조차도 죽을 수 없는 지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구더기 같은 미물도 죽지 않고 영원히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소금 치듯 함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소금은, 쉽게 상하는 음식에 칩니다. 물고기를 예로 들어보면 겉에 한두 번 살살 뿌려서는 안 됩니다. 아가미도 벌리고, 배도 열어서 소금을 칩니다. 심판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세밀한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생선의 구석구석에 소금치는 손길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지옥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빠지지 않고 미침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옥의 다른 단면은 나사로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입니다.


    눅 16:23-24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여기서 ‘그’는 부자입니다. 부자라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부자로 살면서 자기 집 문간에서 고통 받던 나사로를 기억하지 않고 자기 배만 불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에 임하기 때문에 자기 주변의 고통 받는 대상을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존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서 어떻게 반응하나요. 24절입니다.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것도 이미지입니다. 실제 천국과 지옥이 가까이 붙어서 서로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도 인간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감각이라는 것이 예민한 채로 지옥에서 계속된다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가 예민하면 작은 소음에도 일상생활에 방해를 받습니다. 코가 예민하면 사람 냄새, 먼지 냄새, 기계 냄새 등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삶이 괴롭습니다.


    오감은 예민한데 이 감각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결핍은 극대화되어 고통이 커집니다. 이 부자도 목이 마르다는 감각은 살아있으나 이 감각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귀가 예민한 사람이 락콘서트 스피커 옆에 서 있는 것처럼, 감각은 예민하고 결핍이 있으나 해결되지 않는 상태, 이것이 지옥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단면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을 보시면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번 지옥은 어둡습니다. 지옥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면 밝아야 된다는 면에서는 모순되어 보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들은 지옥의 단편적 이미지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임재로부터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죄가 가득하고 은혜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어둡고 검은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울며 이를 갑니다. 울음은 부정적 감정이 극화될 때 나옵니다. 슬퍼서 훌쩍훌쩍 우는 것과 이를 갈며 우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화나고 부정적 감정이 증가돼 통제할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를 갈며 웁니다. 이 땅에서 가끔 느끼는 분노, 억울함, 미움과 같은 감정이 수만 배가 극대화된 채로 그 감정들이 영원히 폭발하듯 솟구치는 곳일 지옥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식하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주시는 햇빛과 물과 공기뿐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힘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이 하나도 없는 채로, 인간의 욕망과 감각은 극대화되어 있고, 여기에 더해,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와 그 일당과 영원히 함께 있는 곳, 그 곳이 지옥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2조를 보시면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일반 사람이 감옥에 가게 된다면, 갇히는 것 자체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더 걱정할 것 같습니다. 악의 실체인 마귀와 그 부하들이 인간과 함께 있고, 그들도 같이 심판을 당하고, 거기서 또 서로 괴롭히고 서로 고통 하는 곳,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지옥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분리된 결과들을 경험합니다. 가장 흔한 것은 ‘~만 있으면 좋겠다’는 결핍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핍이 채워져도 인간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좋은 것이 나에게 있다 해도, 이미 있는 것은 별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 안에 있는 불만족과 욕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벗어나지 못하면 죄가 가져오는 결핍과 욕망으로 이 땅에서도 마치 지옥을 사는 것처럼 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결핍과 욕망, 때로는 영혼을 휩쓰는 부정적 감정들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이 아니면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가를 우리가 경험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 저주임을 고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좋은 것만을 경험하고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해서 인간이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이전 세대에 비해 요즘의 젊은 부모님들은 양육에서 칭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칭찬만 많이 들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