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2절 말씀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표어나 건학이념으로 사용하는 대학교들이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을 포함한 미국의 몇 학교들과 한국에서는 연세대학교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이것을 표어로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상 사람도 좋아하는 ‘진리’와 ‘자유’라는 두 단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 배경에서 세워진 학교들이 이 구절을 건학이념으로 삼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의 마광수라는 교수는 건학이념과 반대로 ‘자유를 알지니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다 보면 그 자유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진리의 길을 찾게 되니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말고 네가 원하는 자유를 누리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보면 변태적인 성욕에 매여 평생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음란물로 규정된 책을 쓰고, 구속되고, 해임당하고, 복직 후에는 왕따를 당하고, 대중의 비난에 시달리고 경제적으로도 생활고를 겪다 우울증으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에 대한 유혹과 영향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는 길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나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31절과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두 구절은 병행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설명 방식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31절의 ‘내 말에 거하면’은 32절의 ‘진리를 알지니’와 같은 의미이고, 31절의 ‘제자가 되고’는 32절의 ‘자유롭게 하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진리를 알아야 되며, 자유란 곧 예수님이 제자가 되는 삶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누리는 삶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적 자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적 자유란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질서 안에서 충만한 것입니다. 제자 되는 것이 자유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요즘처럼 일정 시간만 일정 장소에서 만나는 학교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고대에서는 스승으로 삼는 분과 함께 먹고 작고 종일 같이 지내며, 그 스승이 말하고 행동하는 삶의 모든 양식을 똑같이 따라하는 자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을 억지로 노력해서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했는데 하나님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가장 처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던 인간이 죄로 인해 이제는 죄가 시키는 대로 욕심에 매여 인생을 살아갑니다. 욕심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속성은 사랑과 거룩입니다. 사랑은 관계적 속성입니다.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실 때 죄로부터 자유로우시고 충만한 생명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혼 안에 공허가 생겼고, 그 공허가 끊임없는 욕망을 만들어내어 거룩하지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형상대로, 말씀의 충만함, 생명이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5장 10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을 ‘성령 안에 거한다, 내 사랑 안에 거한다’고 병행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며 말씀 안에 거할 수 있나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내 욕망을 채우고자 하기에, 노력으로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성령의 인도와 힘을 따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욕망을 벗어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명령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한도에서만 누군가를 돕거나 사랑하고, 진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성도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이며 그가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진리를 아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수준으로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 듯’ 진리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반영되는 것이 진리를 아는 삶이자 참 자유입니다.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욕심과 죄에 이끌린 인간의 상태를 창세기 1장 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물론 이것은 원시 지구의 상태를 묘사한 모형이지만, 성경은 이를 통해 인간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혼돈’은 질서가 깨진 상태, 틀이 없는 상태로, 영어로는 formles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와 틀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질서의 틀로 모두와 관계를 맺으라고 인간을 만드셨는데 이 틀이 사라지자 다른 존재를 나의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하고 하나님조차 우상 숭배하게 됩니다.
틀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버린 상태, 생명이 없는 상태, 즉 틀도 없고 내용도 없어 공허해진 영혼의 상태를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에 틀을 세워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질서를 세우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인생 가운데 사랑의 질서를 세워 가실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는 세워진 세상의 질서 안의 내용물들을 채우셔서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생명이 채워졌을 때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그림으로 보여주십니다. 틀도 세워지고 내용물도 채워진 결과가 창세기 2장 2절에 나옵니다.
창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내가 지배를 받거나 영향 받지 않는 상태, 더 이상 피곤하고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 그것이 사람들이 열망하는 안식이자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자유와 안식은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세워져 우리가 하나님만 열망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채워진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제자’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제자가 아닙니다. 제자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 내 안에 있는 안식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 우리는 우리 안의 충만함으로 인해 욕망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 살면서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육신이 있는 이상 우리는 여러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밥을 먹었는데 훨씬 더 먹고 싶은 것, 돈을 가졌는데 훨씬 더 가지고 싶은 것 등입니다.
이를 제도적으로 막으려던 시도 중 무엇보다 강력했던 이론이 공산주의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누리고 공평하게 살아가는 이런 세상이 이론상으로는 완벽했지만, 상상할 수 없이 부패하고 악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권력을 한두 명에게 이양하여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권력을 자기만을 위해 쓰며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모든 사람을 죽이며 비참한 결과를 남겼습니다.
지난 20세기의 절대 권력을 가졌던 두 사람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죽인 사람이 1억명 정도됩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1940년대에 전 지구의 인구가 20억 명 정도였으니 지구의 20분의 1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지금도 누구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욕망이 가져오는 무절제의 파괴를 보면서도 인간은 모두 그런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대치동의 아이들과 가족도 그 열망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가거나 주위에서 죽음을 목도하면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 다 놓고, 육신도 벗어버리고 가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정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는가를 평가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 명령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로 사는 것에, 나를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에 드러날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더 성공하고, 더 높아지고, 자신을 증명하라는 거짓에 흔들려서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 제자의 삶을 보이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33절일 것입니다.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는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도 자기는 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유를 열망할까요. 매였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아는 자가 자유를 열망합니다. 우리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체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자기가 원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삶이었기에 이들은 간절히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지해야만 자유롭지 못한 삶, 인간다운 삶,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갈망할 수 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과 동행하길 간절히 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34절에서 뭐라고 하시나요.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는 영적 힘이기 때문에 결심이나 노력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3: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벨을 죽이기 바로 직전, 분노가 가인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엎드리다’는 사나운 짐승이 다른 짐승을 잡으려고 몸을 웅크려있을 때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사자처럼, 죄가 문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이 때 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 이는 대구로, 생략법이 사용된 문장입니다. 빠진 부분을 넣어 읽으면,
죄가 너를 다스리길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길 원할지니라
이 기법은 주로 잠언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 형법으로, 앞과 뒤에 비슷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면 하나씩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다스리길 원하나 다스리기를 원할지니라’에서 같은 단어가 반복이 되니, 앞 문장에서는 ‘다스리기를’을 빼고 뒷 문장에서는 ‘원할지니라’를 빼어서 문장을 줄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여자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기를 원할 것이니라’에서 앞 문장에서는 ‘다스리기를’을 빼고 뒷 문장에서는 ‘원할지니라’를 빼어서, 결국 여자나 남자나 똑같이 서로 다스리기 원해서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죄의 무서운 결과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서운 죄가, 인간을 다스려 파괴와 멸망을 가져오기 위해 문 앞에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을 보시면
창 3: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것은 우연이나 충동이 아닙니다. 무서운 죄가 사람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를 지배하고 영향을 미쳐서 어떤 행동과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입니다. 영원에서부터 어떤 영향력이 우리를 지배하기에 하지 말아야 될 결정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을 하게 됩니다. 35절에서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죄가 지배하여 결과를 남기는 인생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상속과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자가 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그 영광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드러나는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본질은 거룩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실 때 거룩하시고 함께 계시면 사랑이시라 그 거룩과 사랑을 우리가 갖게 될 때 우리 존재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다라고 여기시는 존재는, 자신을 가장 닮은 존재, 이 땅에서 예수의 제자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인 사람일 것입니다. 고대에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스승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스승님처럼 말할까, 어떻게 하면 스승님의 모습을 내가 조금이라도 보여줄까 열망했듯이 우리가 하늘의 모습을 이 땅에서 따라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이 결과가 36절에서 마지막으로 뭐라고 나오고 있나요.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자유는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살기로 정하는 순간 인간은 죄의 유혹에 사로잡혀 죄가 이끄는 대로 살게 되며 이는 결국 파괴와 멸망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가장 자유로울 때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사랑하며 자연스럽게 용서하며 자연스럽게 욕망을 내려놓는 것, 즉 우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실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며 가장 큰 영광입니다. 진리와 함께 거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 안식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