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기 전에 외모로 판단을 쉽게 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오해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본문 48절입니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는 귀신들린 자라고까지 오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vv.49-51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4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 독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를 귀신과 한 무리로 묶어 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이유는 ‘내가 내 아버지를 공경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공경’이란 하나님만을 유일한 의존, 유일한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그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하셨다면 귀신 들린 자로 여김을 받기는커녕 인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이 하나님을 공경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51절입니다.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은 영생을 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도 단순히 고통 받던 한 두 사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것이 영생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생과 귀신 쫓아내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마귀나 귀신이라는 헬라어를 번역하면 ‘더러운 영’ 정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번역 과정에서 ‘더러운 영’에 해당하는 한국어가 없자,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것 같은 ‘귀신’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귀신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한국의 처녀귀신, 몽달귀신 등 예로부터 그 단어와 연관된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되어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존재는 마귀의 도구이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반대말은 ‘거룩한 영’ 즉 성령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한 인생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은 마귀의 종이고 노예이며 그 결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마귀가 모든 사람을 직접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졸개와 같은 더러운 영을 보내 사람들을 지배하여 그들이 계속 죄를 짓다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들을 예수님이 왜 쫓아내셨나요? 영생이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더 이상 마귀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한 상태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는 귀신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어떤 존재도 마귀의 통치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가시적으로 귀신이 나는 것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이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에 관심이 많은 교회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마귀는 활동을 하고 있고, 악의 졸개인 더러운 영들이 사람들을 다스리고 죄를 짓게 만들기에, 축사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에서 귀신들이 쫓겨가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나요? 아닙니다. 이것은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 결과는 꼭 가시적으로 귀신이 떠나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노예 상태로 있던 자가 죄의 참혹함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맡겨드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대표적 모습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통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더러운 영이 떠나갈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한번은 가시적으로 확인해야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나, 예배의 기쁨,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자유한 평안함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이지만 이것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를 축사를 통해 보여주시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이 마귀의 노예들에게 고통 받은 자들을 구원해주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행위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왕이 존재한다면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더 많은 사람을 귀신에 사로잡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반대 상황이 벌어졌으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 2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것은 예수님이 온 세상에서 제일 강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 눈에 예수님이 약한 자입니다. 볼품 없고, 배우지 못했고, 가난하고, 시골 출신인 분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며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적으로는 강한 자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었던 일, 마귀의 세력을 부수시고, 마귀에게 매인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시셨습니다.
지금 가시적인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힘이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이 영적으로 온 세상의 왕이며, 마귀권세를 다 깨뜨릴 분이며,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의 형벌로부터 자유케 하실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공경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 모든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영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살고자 했으며 유일한 관심은 돈과 인기와 영광이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이 없이 세속의 영광과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기도 알지 못한 채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를 오해합니다. 사실 우리도 세상의 축복을 원하던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고, 영생을 열망하게 하시고,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 기적입니다. 이 마음이 있다는 자체가 무지와 오해로부터 자유를 얻어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vv.52-59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예수님의 말을 근거로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육적 삶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도 결국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죽음을 보지 않는 생명’은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인간의 육신이란 옷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라져버릴 옷 같은 육체에 인간을 넣으신 것입니다. 물론 육신은 옷보다 오래갑니다. 70, 80, 90년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신도 중요하고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을 가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시각에서 육신은, 잠깐 입었다 벗는 옷처럼, 이 땅의 사명을 마치고 나면 훌훌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대신 육신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는 절대로 영원한 나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 바리새인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몰아갑니다. 53절입니다.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들이 생각하기에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면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을 밝혀서 상대를 압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54절입니다.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예수님 스스로 본인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해 땅에 오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하나님이지만, 자기 영광을 취하기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인간과는 철저히 다른 존재이심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한 존재의 본질과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놀랍게 가장 많이 보여주신 자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우리 생각에 영광스러운 때는 1등 했을 때, 축구 골을 넣었을 때, 미스코리아 당선되었을 때 등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물론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예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영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영광스러울 수 있나요? 인간은 높아지길 원하고, 사랑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보복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없는 모습,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본질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도 원수도 사랑하시고, 공의를 행하실 수 있는데 그 공의를 자신에게 행해 자신을 죽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전부 다 담겨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예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노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요 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는 열심히 특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생업을 버려두고 예수님이 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당시에 자기 배로 어업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중산층 이상의 부가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열심도 자기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그냥 매달리는 것도 비참한 고통인데,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라고 합니다. 어떤 인간도 이런 죽음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세상에선 칼을 들고 싸웁니다. 결사항전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데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연약할 때, 아무것도 못하고 울 때,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내 뜻과 내 열심, 내 노력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인생 가운데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전에 철저하게 힘을 빼는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하는 세상은 이런 영광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이유도 그들의 영광이 가려져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가려지자 분노하고 미움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있던 이들은 결국 어떤 평가를 받나요? 55절입니다.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참 안타까운 선고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한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거짓말쟁이다’라고 평가하십닌다. 예수님은 또 56절, 57절에서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저들은 예수님의 말마다 육적 차원에서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보기를 원했던 ‘때’란 바로 지금,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때, 메시아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때, 마귀통치에 지배를 당해 벗어나지 못하던 자들이 자유케 되는 때이며,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모든 축복은 바로 이 때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지 2000년이 지났다고 냉소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58절입니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내가 있다’는 영어로는 I AM이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하나님을 뭐라고 소개할까를 질문했을 때 하나님은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라고 소개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란 이름의 유래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I am who I AM이라고 번역합니다. 앞의 I am은 ‘나는 무엇이다’라는 주어와 동사이고 who 뒤의 I AM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번역하자면 오늘 본문대로 ‘내가 항상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을 아는 이들은 극렬하게 반응합니다. 59절입니다.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을 넘어서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한, 마귀에게 노예 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유와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육적인 삶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영생에 대해 아무런 이해를 하지 못한 채로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꿈꾸며 이 땅을 살고 계신가요? 이 땅에서 꿈꿔야 할 것은 영생을 열망하여, 우리 영광이 아니라 문득문득 나타나는 하나님 영광을 드러냄으로, 진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