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창세기 1장에는 어두움 가운데 빛을 처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빛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창세기 1장 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하다는 것은 틀이 없다는 것이며, 질서가 깨어진 상태입니다. 틀이 없으니 아무 내용도 담기지 못한 상태가 바로 공허입니다. 틀도 없고 내용도 없는 상태, 즉 혼돈하고 공허한 것을 합쳐 ‘흑암’이라고 하고, 이것은 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원시지구의 상태이지만 성경은 이를 밑그림 삼아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흑암’이란 하나님의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빛은 하나님의 생명이 임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이 빛을 생명의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계속해서 3절과 4절이 나옵니다.
창 1:3-4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는 곳에 진공상태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셔서 어둠과 빛을 나누시는 그림은 하나님의 생명이 어둠을 몰아내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표현하는 모형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첫 창조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재창조의 모형이었으며, 본문은 창조를 통해 어떻게 어두운 자가 빛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빛을 주시나요?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여 빛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빛을 주시나요?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여 빛을 주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신약성경에 나오는 맹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대표합니다. 맹인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있거나 없는 상태가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태어날 때부터 쭉 어둠의 상태 가운데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없는 채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는 또 다른 맹인들도 등장합니다. 육신으로는 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둠 가운데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물음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인과응보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장애가 있거나 고난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죄 때문에 그럴 것이며, 그 사람에게 단서가 없다면 심지어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식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고통하고 죄를 안 지은 사람은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어둠의 상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의 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사람들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에 갇혀 있는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상당 부분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의 틀로 인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정죄로, 나는 선하다는 자기 의를 얻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 벌어지는 고난이 항상 설명 가능한 원인들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 사고, 전쟁으로 피해를 보는 분들이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리며, 또 한편 나는 잘못이 없으니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과응보적으로 인생을 판단하면 자꾸 문제가 생기며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맹인을 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죄인 아니면 죄인의 자식으로 바라보며 나는 그와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의 어둠입니다. 결국 강력한 어둠은 관계를 깨트리며 자기 자신은 고난을 피해갈 근거를 찾고자 남을 정죄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일을 행하시고자 내가 맹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치 인생의 주인처럼 살아가지만 사실 많은 일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일어납니다. 영적 눈을 뜨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기 인생을 재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눈이 떠지는 과정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내 인생에 원망과 불평과 불행의 이유였던 조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시각 안에서는 의미 있고 또 꼭 필요한 일들이었다고 재정립하는 과정이 어둠에서 빛으로 재창조되어 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도,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많이 힘들고 불평했지만 결국 바로 그것 때문에 더 기도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절제를 배우게 되고, 그것 때문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약함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은 훨씬 더 중요한 겸손,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구절을 보시면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육체적 연약함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육신적 눈으로 보면 인생의 병, 고난, 어려움은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시각에서는 이것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교만이 깨어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만들며 결국 인생을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도구인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눈을 뜨는 과정이며 빛이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것이 다릅니다. 능력도 기질도 다르고, 남들이 가진 좋은 것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혹은, 고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마저도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4a]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
낮은 태양이 떠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계시는 지금이 낮이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증명하시고자 지금 이 일들을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4절 하반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b] …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마치 태양이 사라진 것 같은 깜깜함이 세상에 임했을 때 제자들도 다 슬픔에 사로잡히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이후 성령이 오시기까지의 어둠의 기간 이 밤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이제는 밤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어두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할 능력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지만 반대로 예수님이 안 계시면 어둠이 자신이 빛인 것처럼 우리를 속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는 빛과 어둠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빛이 비추면 그 빛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고린도서 11장 14절과 15절을 보시면
고후 11:14-15 [14] …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마귀는 자신이 인생을 파괴하고 망가뜨린다고 선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축복을 줄 것 같은 도구로 그들을 유혹합니다. 하죠.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도 광명의 천사처럼 왔다가 자기 밑에 사람들을 복속시켜서 수천만 명을 죽였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도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 임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5절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나요?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 6절처럼 일하십니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실 수 있으신 예수님이 왜 지저분하게 침을 뱉어서 흙을 짓이겨서 눈에 바르셨을까요? 사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자신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첫 창조를 재현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시면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었을까요? 아마 신약을 구절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흙먼지가 날아와 사람의 형태로 스스로 뭉치기 시작해서 아담이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창세기 장면을 재현하시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눈이 없거나 혹은 안 보이는 사람은, 사실 눈이 만들어지다 만 것입니다. 다른 곳은 다 채워졌고 눈만 빈 곳에다 예수님이 흙을 개어 눈을 채워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땅의 흙을 가져다 물에 개어서 인간이라는 모양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일부러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던 모습대로 눈이 없는 자에게 재창조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구원입니다. 단순히 육체적 눈을 뜨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이렇게 뜨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변화가 나타나서 이전에 못 보던 것들을 보고, 이전에 집착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더 영광스러운 곳을 향해 우리 눈이 열리고 있다면 우리도 지금 재창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여 당장 영적 시력이 2.0이 되어 잘 보인다면 좋겠지만 영적인 눈은 참으로 천천히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진짜 믿음에 따라 행동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라면 얼마나 불행한가요. 여기가 전부라면 얼마나 허망한가요. 하지만 이곳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하시는 과정이며,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지금 우리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들을 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크고 놀라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눈이 열린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은 한편으로는 심판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39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것은 육신의 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교만한 자들은 결국 영적인 것을 영원히 보지 못하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도 읽지 못하고,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 연약한 가운데 하늘의 오묘한 것을 보며 하늘나라를 소망한 자들은 예수님이 보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흙을 바르는 것을 넘어 예수님이 한 가지를 더 하라고 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장소 혹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자’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해 왔습니다. 실로암은 결국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2절을 보시면
요 8:42 …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은, 다른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7절의 핵심입니다. 영험한 약초나 물의 힘이 아닌, 예수만이 주시는 생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수를 먹고 마시며 죄를 씻어야 눈을 떠서 영원한 나라, 그 생명,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되기에 우리 모두 실로암에서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에스겔을 36장 25절은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겔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인간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우상이란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그들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닫힌 자들은, 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끊임없이 붙들며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은 더 깊은 메임과 고통과 갈등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생수로 우리를 씻어주셔서,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재창조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고, 죄를 씻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 이것이 하늘에서 우리가 살아갈 모습이며 이 땅에서 매일 배워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나요. 이 하늘나라를 보며 그 기쁨으로 매일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눈이 희미하여 가끔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고 헷갈리시나요? 눈을 밝게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늘의 눈이 밝다면 온 세상이 전쟁, 정치, 질병의 불안정과 두려움으로 요동할 때에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 자녀세대가 풍요 가운데 빠져 눈이 멀고 영적 믿음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눈을 떠서,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배 중에 사람들이 울고,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며, 소망으로 이 땅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다시 가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