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어린 시절 저에게 주일은 고민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주일 성수’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사먹거나,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기에, 무료하게 TV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주일에도 학교를 나와서 공부하는 것이 의무였기에 찝찝한 마음으로 학교를 가서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사역을 할 때에는, 한 교회에서는 주일에 교회에서 주는 점심 외에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지만, 또 다른 교회에서는 교회 식당이 없어서 수백 명의 교역자, 성가대원, 봉사위원 등이 교회 주변 식당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런 모호한 가치 속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주일 성수라는 규율의 성경적 의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구약에서 주신 안식일은 주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둘은 서로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다른 두 날인데,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안식일과 주일을 결합시킨 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했듯이 주일에도 일을 하지 않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 결론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해 원서들을 연구하다 보니, 성경 해석과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칼빈, 루터, 쯔빙글리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결론 역시 같았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안식과 자유를 주실 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이며,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지금은 이 견해가 많이 알려져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고민이 이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있던 고민이었습니다. 실로암에서 예수님이 한 맹인을 고치신 것도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4절입니다.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치료 중 상당수는 안식일에 대중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안식일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박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할 취급을 받지 않으셨을 테지만, 안식일은 인간의 자기 의를 드러내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특별히 안식일에 치유를 하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죄성과 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자기 의를 가진 사람들, 특히 특정 행위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관된 태도들을 보입니다.
자기 의를 가진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나요?
1. 무능함을 감추고자 애씁니다. vv.8-17
그렇다면 자기 의를 가진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나요. 첫 번째로 무능함을 감추고자 합니다.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
사람들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장님이고,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힘이 없어서 구걸을 하던 거지가 갑자기 눈을 뜨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영적 권위를 가진 바리새인들에게 가지고 갑니다. 13절입니다.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바리새인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영적 권위를 가진 자들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종교성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에서,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다면, 규칙을 지키는 불편함과 힘듦은 얼마든지 희생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맹인이 눈을 뜬 것이 신기해서 물어봅니다. 15절입니다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예수님의 치료 과정을 간략하게 얘기했지만,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방법대로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듯이 예수님이 그 창조의 능력으로 진흙으로 사람의 비어버린 눈을 채우시고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아도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에 갈등이 생깁니다. 16절입니다.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나쁘다고 비난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기적을 행한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날 때부터 모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대해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권위를 부여하던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겼으니 나쁘다’고 주장합니다. 안식일이 자꾸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앞 장에서도 이미 인식일 때문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6장 말씀입니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안식일만 아니었어도 이런 박해와 미움과 공격이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까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킨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남과 다르며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이 수백 가지 종교 규칙을 다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해 어떻게 하면 규정을 어기지 않고 하루를 보낼까를 연구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로 행하던 일들을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심으로, 안식일의 진짜 목적과 이유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오해합니다. ‘안식일을 영원히 지키라’는 구절을 근거로 안식교에서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영원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완성하신 자유에 들어가면 그 때는 더 이상 날짜나 행위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안식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좋은 환경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뒤 안식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우리도 6일 동안 일하고 주일에 쉬자’고 해석한다면 이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이란, 온전한 질서 안에 생명이 채워진 충만함의 결과임을 보여주시고자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 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3일 동안 틀을 세우셨습니다. 이 틀을 다른 말로 하늘과 땅의 질서입니다. 나머지 3일에는 그 질서에 내용을 채워 넣으셨습니다. 바른 틀 안에 바른 내용물이 채워진 것, 이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 안에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이 관계적 질서는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는 질서가 잘 세워지면 그 안에 생명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만족이고 기쁨이고 축복이고 안식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맹인들은 물론 육체의 연약함도 있지만, 영적 생명이 떠나가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의 어둠을 보여주는 모형이기도 합니다. 즉,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의 생명을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안식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구약에서 안식일을 통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예수님을 통해 얻어질 쉼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채 살아갑니다. 인생의 많은 고통은 대부분 관계가 깨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다보니 문제가 생겨 고통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남을 이요하다 보니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리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길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란, 소 두 마리를 묶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일을 처음 배우는 소가, 밭 간 경험이 많은 소와 ‘겨리’로 묶여서, 발맞추어 밭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붙어 겸손과 온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온유란, 하나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거나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면 전도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구제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말씀을 가르치게 됩니다. 사랑하면 섬기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왜 사랑할 수 없나요? 질서가 깨진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고 우리 안의 중심이셔야 되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 대신 자아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겸손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역시나 죄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과 물질을 의존합니다. 그래서 죄인에게 인생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이 질서만 제대로 세워져서 하나님만 온전히 의존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는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분이 계신가요? 예수님을 따라 배우셔야 합니다. 아직 온전한 질서가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이 풍만하게 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온전한 질서가 임해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신 또 다른 목적은 바리새인들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자 하심입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몸부림치며 안식일을 지켰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관심 있으신 유일한 한 가지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주신 예수를 은혜로 받아들이라’고 하시는데, 자기 의가 가득한 자들은 예수 외의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냅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합니다. 은혜를 의존하면 하나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은혜에 의존된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는 사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를 맡깁니다’라는, 하나님 노릇을 포기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행위로 증명 받고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절대 안식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다 결국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인 수치를 가릴 수도 없습니다. 지금도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 얼마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많은 일을 합니다. 외모도 가꾸어보고 명품을 둘러보고 또한 종교적으로 자신을 가장하기도 합니다. 행위를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택한 길이었습니다. 종교 사회에서 종교를 위해 헌신하고 애쓰며 고결함을 유지하였으나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더럽고 추한 인간이 무능을 감추려는 저질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자기 의를 가진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나요?
2. 타인을 죄인으로 평가합니다. vv.18-34
두 번째로 자기 의의를 가진 자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나요? 타인을 죄인으로 평가합니다. 18절과 19구절입니다.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맹인이 보게 되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데, 예수가 했다고 인정하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되는, 이 논리를 해결할 수 없자, 맹인의 부모를 불러 취조합니다. 20절, 21절입니다.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부모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 맹인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떴으나 자신들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위협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시면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1세기 한국에서는 출교가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종교사회에서 출교는 죽음보다 비참한 일입니다. 출교를 당하면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없고, 물건을 나누어 쓸 수도 없고,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한 지역에서 출교당해서 자리를 옮긴다 해도 이방인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공동체에서 파문을 당하고, 동족과 가족을 잃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그 부모도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을 다시 부릅니다. 24절입니다.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눈을 뜨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예수는 죄인이다.’ 이들의 말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못 배우고, 가난한, 사회 하층민에 불과한 자이지만 맹인은 소신껏 대답합니다. 25절입니다.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보지 못하던 자신이 보게 된 것만이 확실한 한 가지라고 명확하게 증언하자 바리새인들이 욕을 합니다. 28절에,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바리새인들은 논리로 대화가 되지 않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놀랍게도 이 맹인이 31절부터 33절에서 이런 간증을 합니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 자녀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내가 눈을 뜨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놀라운 일을 보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이 맹인은 예수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시기에 그분이 의인이시며 그분의 기도에 따라 창세부터 없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역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34절입니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결국 이 맹인까지 죄인으로 몰아세운 뒤 쫓아내 버립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이미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이제는 맹인도 죄인이라고 치부하며, 결국 자신들만 의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이것이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자기 의의 덫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 나름의 판단 기준을 세운 뒤 남들을 정죄합니다. 누군가를 정죄하려면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내가 못 하는 영역을 똑같이 못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량을 베풉니다. 그러나 내가 나은 영역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질책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게으름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주로 부지런한 분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능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주로 똑똑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주로 정죄가 됩니다. 이것이 자기 의의 증거입니다.
이런 자기 의를 가지면 은혜 받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내 판단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예수님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자기 의적 태도를 발견하신다면 회개하시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올려드려 은혜에 사로잡힌 인생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