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전 뉴스에, 태어날 때부터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는 시력 장애를 가진 한 살 아기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특수 안경을 처음으로 착용하자, 눈이 동그랗게 되어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아이 엄마가 아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만면에 미소를 띠며 엄마를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이었습니다. 태어나서 1년여 동안 목소리만 듣던 엄마를 보게 되고, 그 기쁨으로 웃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저에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 맹인도 아마 눈을 뜨고 너무 기뻐서 꽃도, 구름도, 사람 얼굴도 분간해 보며 기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어두움보다 더 강력한 영적 어두움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았을 때는 경험할 필요가 없었던 세상의 포악함과 편협함의 결과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시면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이 사람은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창세 이후에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뜬 걸 본 적이 있냐고 예수를 두둔하며, 이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는 것 같다고 주장을 하자 바리새인들이 ‘감히 네 까짓 게’라고 하며 이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다 결국 쫓아냅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세상의 어둠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적으로 만들어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려 합니다. 맹인은 아마 이런 적대감을 처음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전의 어두움이 육적 불편함이었다면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다 내쫓아버리는 바리새인들은 다른 차원의 고통을 야기하는 어둠입니다. 어둠을 만난 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어둠을 만난 자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세상의 어두움을 만난 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1. 그를 찾아오십니다. v.35
첫 번째로 그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며 직접 찾아오십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을 방문하신다, 찾아오신다는 구절들이 자주 나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에 대한 인지가 없듯 영적으로 눈을 떠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내 신앙이 온전한지, 이전에 경험하던 세상과 지금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잘 구분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영적 눈이 떠지면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것이 죄라는 죄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됩니다. 희미한 시력에서 특수 안경을 쓴 아기와 같이 세상을 밝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주 세밀한 것까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병균까지 다 보인다면 예전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세상 사람처럼 원하는 대로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다고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적 눈을 뜨게 해주시면서 영적 감각을 처음 느끼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죄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민감하던 은혜는 사라집니다. 마치 사랑에 처음 빠졌을 때의 호르몬 변화와도 같은 것입니다.
죄의 인식은 시작되었지만, 자기 죄를 보는 것은 신앙이 아주 성숙해야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초기에는 죄의 인식으로, 다른 사람의 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은혜로 기도하고, 은혜로 말씀 보면서 자신은 점점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옆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 같고,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를 하게 됩니다.
저도 20대 때 은혜를 많이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제 안에서 엄청나게 커졌던 한 가지 생각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비판이었습니다. 제 정죄의 대상들은 주로 목회자들, 교수님들, 신학생들이었지만 그때의 제 기준으로는 지금의 저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판단의 기준으로라면 지금의 저를 판단하면 아마 저 또한 제가 20대 때 과했던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열정도 많이 사라졌고, 기도도 그렇게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때와 달라진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루 종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제가 계속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다른 사람을 향해 뻗쳐나가던 것에서 이제 저의 본질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아가 심판하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자유롭게 됐습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을 봐도 인생이란 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시겠지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가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던 신학생 목회자들을 바라볼 때 지금은 불쌍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제 안에 많아졌습니다. 이런 변화의 본질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35절입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니 자신의 어둠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질상 자기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에 대해 정죄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자기 죄를 스스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본질 안에서부터 튀어나오는 죄와 연약함이 만들어낸 결과가 파괴적이라는 것을 수없이 반복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등을 볼 수 없듯,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여러분 인생 가운데 점점 ‘나는 이렇게 선한 사람이 되고 있어’가 아니라 ‘나는 본질에서부터 어둠이 가득하며 욕구를 채우고자 끊임없이 우상 숭배하는 죄인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닌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타인에 대한 은혜이며 사랑이며 긍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반드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노력해서는 가질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예수님을 찾을 힘도 없고 노력해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데 그분이 오셔서 자격 없는 자신을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 자들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맹인은 실로암 이전에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씻고 난 후에는 예수님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오셨나요?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공동체에서 가장 탁월하다는 이들로부터 쫓겨난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빛을 주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된 맹인의 찬양이 바로 찬송가 289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심은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 밀 듯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는 우리는 참 빛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에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고 어두움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시면 예수님이 찾아오신 흔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두움뿐이던 그 때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는 영이 어두워 그분이 예수님이었는지, 나와 함께 계시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쓰러졌을 때, 낙망했을 때, 고통을 지나가도록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해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참 빛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며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만난 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2.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vv.36-41
두 번째로 세상의 어둠을 만난 자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36절 말씀입니다.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에 ‘나에게 알려주시면 내가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라고 인정하면 어떻게 되나요? 지금 출교로 결의해서 맹인의 부모까지도 아들과 거리를 두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 맹인은 잃을 게 없습니다.
이미 모든 걸 잃어버린 인생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던 거지로 살던 자입니다. 구걸로 연명하던 비참한 자에게 빛이 찾아왔는데 이보다 안 좋을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인정하는 순간 출교라는 사회적 압박이 있지만 믿음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빛을 진정 경험한 자의 반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분이 본인이 암에 걸리고 나서야 자신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서 은혜가 크고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글에 대한 대부분의 답글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미치는구나. 기도해도 암이 낫지 않자 정신적으로 세뇌가 되어 저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세상 사람 입장에서는 병을 고쳐주지 않는 신을 버리고 또 다른 신을 찾든지 해야 하는데 암을 고쳐주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깎아내립니다.
하지만 참 빛을 본 자들은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어두움 가운데 나밖에 알지 못하고 살던 자, 늘 불안하고 욕구는 채워지지 않아 불행하게 살던 자에게 하나님이 참 기쁨과 은혜를 베푸셔서 그것을 받은 자가 다시 어떻게 세상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버릴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37절 말씀입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이 자신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겠다는 고백을 보시며 내가 바로 그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예수님이 계시를 주십니다. 물론 지금은 직접 찾아오시지 않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계시란, 원래 가려져 있었던 것이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에는 특별한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것은 ‘비밀’이라고 합니다. 여기 병뚜껑을 제가 손에 쥐었을 때는 아무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제가 손을 펴면 모두가 병뚜껑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비밀입니다.
계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봐도 모릅니다. 계시를 풀어낼 눈이 열린 사람만 알게 됩니다. 제가 만약 눈을 두 번 깜빡이면 어떤 의미를 전달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칩시다. 제가 설교 중에 눈을 깜빡이면 그 약속을 들은 분들은 ‘아하’ 하고 알지만 남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용이 날아다니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아는 자, 눈이 열린 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마귀의 하나님 노릇은 다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이 땅의 모든 죄악과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읽게 됩니다.
마귀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가 영원히 서서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실 그날이 곧 임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이 계시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눈 지 8년째입니다. 열심히 했지만 아직 성경 전체 중 6분의 1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뭘 하셔야 되나요? 여러분이 그 계시를 통해 예수를 알고자 애쓰셔야 합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0년은 투자하셔야 합니다. 다른 통로로는 예수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 말씀을 완전하게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저에게 성경을 주면서 이 안에 예수가 있는지 보라고 해도 그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되고 계시의 깊이만큼 믿음이 성장해 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를 계시하셨더니 어떤 반응이 나오나요? 38절입니다.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성경에서 ‘절한다’는 경배와 예배입니다. 알아야 예배합니다. 한 존재에게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이 최고의 대상이라고 우리가 인정하는 태도가 예배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예배하나요? 돈을 예배하고 권력을 예비하고 사람을 예배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되고 결국 예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예배하지 못하나요?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분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일주일에 40분짜리 설교 하나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만 예수를 알고, 예수를 알아야 경배하며, 경배해야 다른 어떤 것보다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복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는데도 그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39절입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심판’이라고 하면 하늘에서 번개가 치거나 땅이 갈라지는 형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영원의 관점에서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보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 절대자에 의존하겠다는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이 영적인 눈을 띄워 주셔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니다. 이 땅에서 똑똑하고, 부요하고, 능력이 많아서 구원자가 필요 없는 자들은 영원한 어두움 가운데 살게 되기에 그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두움 가운데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게는 겸손을 허락하시고 눈을 띄워 주셔서 그 나라를 사모하게 해 주십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심판당하는 자들은 자기 죄를 깨닫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심판인지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 어둠의 결과입니다. 40절, 41절을 보시면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육적으로 잘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죄의 결과인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참 빛, 생명을 얻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정말 필요하신 가요? 오늘도 내일도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인도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