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성경에는 목자와 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배경인 팔레스타인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 변화가 크지 않고 건조하며 목초지가 많아서 양을 많이 키웠기 때문입니다. 약 12,000여 년 전부터 중동 지역에서 양을 가축화 해 키웠다고 합니다.
양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짐승입니다. 양모는 지금도 고급 옷감이나 이불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보온성, 내구성, 탄력성, 수분 흡수 및 방출, 염색하기 좋을 뿐만 아니라 양고기 또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양의 이야기로 자신이 어떤 목자이시며 또한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양을 본인이 키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돈을 주고 일꾼에게 맡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삯꾼이라 부릅니다. 성경에 삯꾼이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에 이 단어 자체가 나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품삯을 받고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목자 가운데도 불성실하고 악하게 양에게 대하는 목자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참된 목자라고 칭하시며 참된 목자는 어떠한 분인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합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가요?
1. 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vv.1-2
누가 참된 목자인가요. 첫 번째로 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이 있는데 문 말고 다른 데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밤에 들짐승도 많았고 도둑도 많았기 때문에 높은 담이 쳐진 우리에 양을 넣어놓고, 크고 견고한 문으로 막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큰 우리의 문 앞에 문지기가 밤새 양들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데를 찾아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은 무엇인가요? 7절에 이 문을 설명하십니다.
[7]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비유는 어떤 대상의 특징을 가져와서 그 특징과 부합하는 부분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을 더 잘 보여주고자 사용하는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라고 비유하실 때 목자의 어떤 특성을 부각시킴으로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셨듯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표현하실 때는, 문의 특성을 통해서 어떤 부분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그 문을 통해 양과 관계를 맺는 존재만이 참된 목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외에는 양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좋은 데로 이끌겠다고 주장합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성공할 수 있고, 행복을 찾을 수 있고, 복을 얻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이어트, 사업, 인간관계 등 특정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이야기하는 책들로만 서점의 한 섹션이 가득 차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돈을 내며 그들에게 열광하나요? 사실 인간이라는 자체가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선천적 연약함을 뛰어넘기란 어렵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나를 따르라는 사람들에게 혹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들이 삯꾼이며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십니다. 창조자만이 그 피조물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유일하게 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답은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님만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과 인도함이 예수를 통해 검증되지 않으면 그것은 다 도둑이며 강도처럼 우리를 파괴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문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검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조차 인생의 성공 비법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기부여를 하고, 조금만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며 문제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아멘을 외칩니다. 대중은 자기 욕망을 만족시켜 줄 소리에 반응합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있던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또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연약하니까 우리를 이 죄에서 구원하여 온전케 만들어줄 메시아를 바라보도록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예레미아 10장 21절 말씀입니다.
렘 10:21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 구원이심을 믿도록 하며,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여서 이 땅에서 온전히 형통을 맛보도록 하셨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양떼가 흩어지는 비참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해 초토화 되어버렸고, 남유다는 바빌론에 망해 비참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그곳의 수백만의 사람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직접 찔려 죽지 않았더라도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참하게 끌려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지 않을 때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해 주시나요? 시편 23편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시편 23편 1절과 2절 그리고 4절을 보시면
시 23:1-2, 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역할은 양떼를 인도하는 것과 양떼에게 잘 공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십니다. 육신적인 눈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결국 인생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대상이 누구인가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따라가면 안전할 것 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며 무엇에 눈을 두어야 하는지 기억하고, 개인적으로, 더 하나님을 의존하고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예배가 주1회가 아니라 연1회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1년 364일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1년에 한 번 말씀을 듣는 사람이 말씀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끔 교회를 찾았는데 평소 생각하고 살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교회에서 듣는다면 자기 방식이 맞았음을 확인하고 자기 확신에 차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것들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이 올바른 답이라고 믿고 계신가요? 모든 결정, 모든 판단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오감을 자극하는 짧은 유튜브 영상들에 익숙해져서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설교조차도 어색하고 부담스럽고 왜 즐겁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지 불만이신가요?
제가 교회를 시작하고 실수한 일도 후회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제가 일관되게 예수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8년째 일관되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전했습니다.
여러 분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수록, 내가 살아가던 방식이 예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방향과 다른 것이었다고 깨닫고 계시다면 저는 그것이 제 목회의 가장 중요한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분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깊이 빠지면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말씀 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짓인가 분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3장 4절입니다.
렘 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만이 ‘참 목자’라고 하십니다. 목사도 참 목자가 아니고 삯꾼입니다. 저의 역할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여러분이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소리를 들으셔야 하나요? 예수님 믿으라는 소리입니다. 예수의 인도를 따르지 않거나 그분의 보호와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레미야 23장 5절에서 더 구체화됩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나요? 예수님이 세상의 진짜 왕으로 오셨으면 화려함과 권세와 영광이 있으셨어야 하는데 너무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력한 파워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5년, 10년, 오랫동안 어떤 문제가 지속되고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문제에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본질 자체의 죄성으로부터의 구원, 눈에 보는 것을 의존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구원, 자기 중심성으로 똘똘 뭉쳤던 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 되게 만드는 구원을 우리 인생을 통해 이끌어내십니다.
문제에서만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그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당장 사라지면 아마 이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돌아오고, 똑같은 문제가 생기면 똑같이 반응합니다. 그러나 본질과 습관이 바뀌면 문제 상황에서 반응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저에게도 많은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긴 고난이 사라지고 났더니 고난이 가져온 결과가 남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얼마나 쉬이 사라질 것이며 허망하고 교만한 것이었는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만 믿고 계신가요? 그 인도하심만을 따르고 계신가요?
누가 참된 목자인가요?
2.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vv.3-6
두 번째로 또한 누가 참된 목자인가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고대에는 한 마을에 보통 하나의 양의 우리를 지어서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견고하게 담을 높이 쌓고 문지기까지 세워서 지켜야 되기 때문에 개인마다 집에 설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공동 우리에 마을 사람들 모두의 양들을 집어넣고 문지기를 고용해 문을 지키고 거기서 자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수백 마리 섞여 있는 양 무리에게 주인이 자기 양을 불러냅니다. 예전에 한 영상에서 한 목동이 휘파람을 불자 양들이 쫙 나누어지면서 그중 수십 마리가 휘파람 소리에 따라 그 목동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양들은 미련하다고 합니다. 미련하고 두려움이 많은데, 그렇기에 오히려 누군가 의존할만하고 믿으면 그 대상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리에 와서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선 그 양과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양들 수백 마리가 섞여 있다면 우리는 양을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부른 뒤 무슨 일을 하시나요? 4절 말씀을 보시면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보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거나 무엇을 보았다는 분들의 경험담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떡과 물고기만 영원히 먹는다거나, 목수이셨던 예수님이 지금도 집을 짓고 계시다는 등의 이야기는 우리는 속이는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사실 가장 쉽게 들리는 소리는 세상의 소리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시면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은 ‘이거 먹으면 좋아, 이거 가지면 행복해’하며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소리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예쁘고 멋있어 보이며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소리가 너무나 가득합니다. 또한 이런 세상의 소리에 익숙한 사람은 마귀의 소리에도 쉽게 유혹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시면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왜 하필이면 가룟 유다였을까요? 가룟 유다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하시자, 뭔가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서라도 예수님이 자기 정체를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유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는 어떤 소리가 많은가요? 시편 42편 5절입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
낙심과 불안의 소리입니다. 평소엔 잘 모르다가 위기가 닥치면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모자라. 너는 완벽하지 않아. 너는 성공할 수 없어.’ 이런 소리가 크면 예수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제가 20대 때 은혜를 받고 가장 많이 들린 음성이 예수님의 사랑하신다는 음성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기만 하면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쯤 이 고통이 끝날지, 누구를 만나 결혼할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런 것을 알고 싶었는데 그런 얘기는 안 해 주시고 늘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그 이유를 지금은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의 잘못된 가치 평가의 소리가 너무 커서 그것을 잠재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제 스스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실수에 대해서 자신을 다그치고 제 영혼의 근저에서 이 어둠이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반대로 ‘너는 공부를 잘해서 좋아, 너는 성실해서 착해’라는 잘못된 음성이 제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어둠의 소리들을 상쇄해 내느라 예수님은 사랑한다는 말씀을 수년간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고 계신가요? 모자라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고, 남들처럼 성공하지는 못해도 괜찮고,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유일한 가치는 여러분이 끝까지 예수님을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보시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괜찮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책임진다, 너의 인생의 주인은 나고 내가 인생의 필요를 채우며 너의 생명을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하나님 나라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