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성경은 자주 하나님을 목자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자신을 참된 목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흔히 보던 목자는 대부분 고용된 일꾼들이었기에 이들이 양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과 자신이 다르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목자만이 양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참된 목자가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참된 목자가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1. 더 풍성한 생명입니다. vv.7-10
첫 번째로 더 풍성한 생명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목자이며 동시에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낮에는 양들을 데리고 나가서 풀밭에서 풀을 먹게 하고 밤이 되면 다시 마을로 데리고 와 커다란 공동우리에 넣어놓고 양을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는 것은, 자신을 통하지 않고 양들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양들을 해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전에 왔던 종교지도자들 또 지금도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자들이라 그들이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절도와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10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10a]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목자의 보호가 없이 도둑을 만나면 양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도둑은 누구인가요?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열심당, 서기관 등도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한 두 세력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유다가 바빌론에 망하자 그 중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이, ‘우리가 망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이다’라며 이제부터 누구보다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하나님의 복을 얻어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을 ‘파리심’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후예들이 점점 집단화되어 바리새인들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었고 또 구체적으로 성경의 율법 외에 많은 문항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율법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게 되었고, 이들은 세세한 조항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킬수록 자기 의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만 하더라도 조항이 너무 많았습니다. 무엇이 더러워서 손으로 스윽 닦으면 ‘청소하지 말라’는 법을, 신발 끈이 풀려서 묶으면 ‘묶지 말라’는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율법으로 제한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열심히 지키고자 하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의는 반드시 ‘내가 남보다 낫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복을 받을 존재’라는 생각을 가져옵니다. 내 인생의 성공은 내 열심의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도 못 지키는 인간, 게으른 인간, 의지가 약한 인간 등으로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도, 이웃과도 관계가 깨어집니다. 이 대표적인 사람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눅 18:10-12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일주일에 이틀 금식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향신료 옆에도 십일조 통이 있었습니다. 후추를 뿌리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렇듯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살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 안에 이것이 지나친 자기 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남을 다 하찮게 여기는 태도의 근원, 즉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악이 점점 커지게 된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이 죄는 세상에서는 성공하는 것으로 표출되지만 종교적으로는 종교 행위를 통해 남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율법주의입니다.
2천 년 전에만, 유대라는 특별한 환경에서만 바리새인이 존재했나요? 아닙니다. 행위로 내 가치를 인정받고, 내 열심의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죄악이기 때문에, 이 죄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는 이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나, 교회에서마저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율법주의 성향이 횡행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 마치 축복의 통로인 것처럼, 열심 내는 사람은 복을 받고, 봉사 많이 하면 축복을 많이 받는 것처럼 가르쳐온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는 어떤 종교적 열심을 내었는가와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기질과 환경이 다 다릅니다. 그 사람의 지능, 능력, 가정환경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지 기도를 열심히 했다고 모두 좋은 학교 가는 것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것이 은혜인데, 은혜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대가를 치르고 받은 것은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래입니다. 성경은 왜 은혜, 은혜, 은혜를 강조하나요?
하나님께 받는 모든 것은 우리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교회를 몇 개를 짓고, 가진 것을 내어주고, 몸을 불사르는 헌신을 했더라도 사랑에 근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이 가장 높은 곳에 사랑을 올려놓는 이유는,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다스리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 배우자, 부모님조차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조건 없는 사랑을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 본성을 거슬러 내린 은혜입니다.
노력해서 결과가 나타나면 다 자기 의로 수렴된다는 것은 제가 젊어서 늘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젊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영성이 높아지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는 누구보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돌아보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과정이었습니다. 제 영혼에 잠재되어 있던 무서운 율법적 태도가 가시적으로 드러났고, 그것이 얼마나 관계를 깨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게 되며 제가 정말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회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말고 당시에 또 강력한 종교적 영향을 미치는 집단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 시대의 사독의 후손으로 성전에서 일했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필사하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일하다 보니까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에 오면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얼굴이 생겨진 당시의 동전은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성전에서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로 지방의 동전으로 환전을 해서 바쳐야 했는데 그때 환전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환율은 값을 부르기 마련이기에 두 배, 세 배씩 수수료를 받았고, 또한 환전해 주는 자리를 매매해서 권리금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전에 올 때 제일 중요한 일은 양, 염소, 소,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율법에 ‘흠이 없는 제물’을 바치라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나, 모든 동물에서 흠을 찾아내며 자신들의 목장의 짐승들만을 사용하도록 하며 폭리를 취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예루살렘 옆에 목장을 운영하며 자신들 목장의 동물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퇴짜 당할 본인의 동물은 가져오지 않고, 울며 겨자먹기로 몇 배 비싼 사두개인들의 목장의 가축을 사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남자는 1년에 세 번 씩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성전세를 냈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엄청난 장사였습니다. 이 돈으로 로마에게 뇌물을 주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 1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마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사두개인들이 권리금을 받으며 가축을 사고 돈을 환전하는 사람들을 허용하자, 이 성전의 안뜰 외에는 장사치들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바깥들은 원래 여자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장소였는데 도저히 예배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이 나쁘다는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도 자기 욕망을 취하려 하는 인간의 무서운 기복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는 종교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산이지만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이 무서운 산을 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벌 받지 않으려고 십일조를 내고, 칭찬 받기 위해 주일을 열심히 지키고, 더 많이 받기 위해 감사 헌금을 내고, 이렇게 거래의 의미로, 보상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 종교학자는, 다른 나라보다 한국에 강력한 이단이 많아진 이유가 바로 한국의 율법주의와 기복적 기독교의 결과라고 이야기한 글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선교사를 파송한 통일교, 열심인 성도가 너무 많아 매달 시험을 치며 십사만 사천 안에 들고자 하는 신천지, 크고 멋진 건물을 뽐내는 하나님의 교회 등이 바로 한국을 기원으로 하고 있는 이단들입니다.
이단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교회와 비슷하고 미혹되어 간 것도 있지만 대부분 그곳들은 사람들을 엄하게 관리합니다. 물론 단기간의 효과는 좋을 수 있지만 모든 관계는 자발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영적 자발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성장했던 때는 언제였나요? 누군가 여러분을 몰아 붙여서, 숙제 내고, 체크하고, 지적하고, 평가를 해 줄 때였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 인생이 찾아오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보고 싶고, 기도도 하고 싶고, 은혜 받는 자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은혜로 시작된 것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안 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9절에 말씀하십니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구원받을 때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고 나오고, 예수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꼴을 먹는 과정을 10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0b]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구원받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계속 꼴도 먹어야 합니다. 예수로 말씀 보고, 예수로 교회생활 하고, 예수로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생활을 해야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기복주의와 율법주의는 예수를 배제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사니까 예수 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사람과, 예수로만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사람의 외적인 행위는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하나님의 뜻이며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기복주의와 율법주의의 거짓말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로 인해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참된 목자가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2. 목숨입니다. vv.11-15
목숨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즈음 개나 고양이를 많이 키우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개나 고양이를 위해 여러분 목숨을 대신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마 인간의 목숨과 등가로 놓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나 고양이보다 더 심한 가정이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양은 털 깎아서 팔고 그 후에는 먹으려고 키웁니다. 양을 키우는 목적은 명확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양을 위해 생명을 내걸 수 있나요? 예수님은 일부러 상식적이지 않은 충격적인 반응을 야기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목자의 사랑이 특별히 누구와 대조적인지가 12절,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삯꾼이 무조건 나쁜 사람은 아니고, 그저 ‘고용된 일꾼’입니다. 양을 가졌다는 것은 돈이 많다는 것일 테니 아마 많은 일꾼을 고용했겠지요. 삯꾼이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양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들짐승이 오면 먼저 도망가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일부러 자기와 대조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라고 하십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요? 양을 위해 대신 죽으십니다. 왜 예수님이 양을 위해 죽으시나요? 14절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우리를 너무 잘 아셔서’입니다. 얼마나 잘 아시나요? 15절입니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듯,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듯, 우리를 아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그냥 한 존재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잘 아신답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우리 미래에도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자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이 생명이며, 이 생명으로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것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아픈 사람은 병 낫는 것, 돈 없는 사람은 물질적 풍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결혼, 가정이 불행한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결핍과 고난을 치워주시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가 부족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돈 주세요’ 기도해서 돈 문제가 해결됐다면, 아마 돈을 의존하고 돈을 우상으로 삼는 우상숭배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님이 우리의 진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결핍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의 본질은 결핍입니다. 이 결핍이 우리 인생에서 무슨 결과를 주나요?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새 사람을 살아나게 만들어 광야를 마친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입성하는 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느끼신다면, 그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우리가 깨닫지 못할 본질적 죄를 다루고 계시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목자로 믿으심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