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성경의 많은 내용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어이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셔도 어떤 사람들은 본문 42절처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믿음으로 반응하며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20절처럼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믿지 않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나나요? 믿음이란 영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로, 자기도 알지 못한 채로 예수님을 믿게 되지만, 하나님이 개입이 없이는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성경 말씀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은 무엇인가요?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1.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vv.16-29
첫 번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17절 상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7a]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
앞서부터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씀을 하셨고 여기서는 심지어 ‘버릴 뿐 아니라 다시 얻을 것이다’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세상 사람에게는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17절 하반절을 보시면
[17b] …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 자기 생각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결정하신 주권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18a]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누군가의 힘에 의해 죽는 것은 세상에서도 쉽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음도 예수님이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것 역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같기도 합니다.
요즘은 안락사라고 해서, 내가 더 이상 삶을 이어가기를 원치 않을 때, 내가 원하는 시간에 생명을 끊는 제도가 있습니다.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뒷부분에
[18b]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안락사하는 사람은 다시 살아나겠다고 결정했다고 해서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도 사실 죽음에 대한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생명을 내어주겠다고 하시나요? 그 목적이 10장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릴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 다시 살아나겠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얘기가 사람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나요?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얼마나 이해가 안 되었으면 귀신에 들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미친 것 같은데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귀신 들려서 미친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것도 선택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법정 스님도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을 좋아해서 자주 읽으시고 예수님을 존경한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존경하는 것인가요? 고대의 훌륭한 위인, 좋은 말씀을 하신 분, 서로 사랑하라, 욕심 내지 말라고 가르치신 선인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을 전제로 하나요?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전제합니다. 이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나의 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인을 위한 죽음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죄를 위해 죽으시고 끝인가요? 아닙니다. 그 분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과 판단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은 십자가를 미련하다 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창조과학회의 글이 게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 내용은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여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 가운데 몇 가지를 클립으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었습니다.
달의 지름이 달과 태양과의 거리의 정확히 400배에 해당한답니다. 그러니까 달의 지름과 태양의 지름도 400배, 또한 거리도 400배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일식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거리나 크기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완전 일식은 불가능한데, 거리와 크기가 완벽하게 400배로 서로 맞아서 완전 일식이 일어날 확률을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의 분이 ‘그래서 과학을 진지하게 대하다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밑에 벌떼같이 달린 답글들이 상상되시겠지요? 아직도 저런 걸 믿고 동조하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있나! 대부분 세상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우주에서 확률상으로 불가능한 증거를 가지고도 이러한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믿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적이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일상적인 날들입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독특한 일들이 일어나서,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 매일 신이 날 텐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가장 놀라운 차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3절과 24절은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고전 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일까요? 사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 이방인들만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도 인권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게 죽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사형제도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바로 죽지 않습니다. 매달린 순간 몸이 늘어지고 횡격막이 위로 잡아당겨져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못에 걸린 힘에 의거해 몸을 끌어 올려서 살짝 숨을 쉽니다. 그러나 손목이 몸무게를 지탱하기가 힘이 드니 다시 내려가고 또 숨이 막힐 때 다시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그 전에 얼마나 고문을 많이 당하셨는지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지만 그 상태로 일주일을 연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보면 거기서 울부짖던 사람들이 연상되었습니다. 정복자들이 자기들을 파괴하고 비참하게 죽이는 사형도구였던 것이기에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최악의 도구로 예수님을 죽이시고 그것으로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지금도 십자가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는 가장 근원적 차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6절과 27절에서 뭐라고까지 말씀하시나요?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분이 부활하여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 자들은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우리가 그분의 양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원을 가르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원리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의 기적을 목도하지 못 하시더라도,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놀라운 은혜를 받은 백성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2.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vv.20-42
두 번째로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것은 단순히 삼위일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권세와 영광과 위엄이 예수님에게 위임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왕을 섬겼으니까 왕의 독생자라고 하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고 행사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이 말씀을 하셨나요?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순간을 조절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셔야 합니다. 사람들의 적대감이 너무 크면, 자신이 예정하신 시간이 앞당겨질까 봐 늦추시기도 하고 사람들을 피하시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적대감이 증폭된 지금 왜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선포하셨나요? 28절과 29절 때문입니다.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자기 양들 자기 백성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 양이 되고 내 음성을 듣는 자는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기에 누구도 그들을 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는 맥락에서 30절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십니다. 그 하나님을 누가 대적하며 그 하나님이 백성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지키시듯 내가 그들을 지켜 절대로 멸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입니다.
사실 성도들도 가끔 예수님이 힘이 약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히어로들은 체격도 다부지고, 고통 속에 힘든 사람을 쏙 빼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우리도 그런 예수님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숭배적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같이 지나가시며 거기에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고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약속을 주십니다. 당장의 강력한 힘으로는 아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나의 삶에 계시고 책임지실 것임을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자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31절입니다.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왜 ‘다시’ 돌을 들었나요? 8장에서도 예수님이 죽이려고 했고, 지금 10장에서 죽이려고 하고, 예수님이 하는 말끝마다 욕을 하고, 조금 더 심한 말을 하면 죽이자고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예수를 자를 견뎌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33절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를 너무 정당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3] …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그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이면 안 되거든요.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사실 한국도 몇 십 년 전만 해도 재림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가 요즘은 시들해졌습니다. 이 땅의 삶이 평안해졌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로마의 압제에 고통하며 비천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한 지가 지금은 벌써 3, 400년이 됐고,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매일 성전에서 주여, 언제입니까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망대로 예수님이 오셨더니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들이 열망하던 메시아가 로마 황제를 단번에 부수어놓고 로마 군대를 말씀 한 번으로 없애신 뒤 유다 나라에는 황금을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 부어 주시고 풍요와 세상의 권세를 주셨더라면, 그러면 그 사람을 메시아라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배경 없는, 능력 없는 모습으로 오셔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하시니 이들이 없애고 싶어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상합니다. 슈퍼맨, 아이언맨 등 온갖 맨이 합쳐진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지루하고 불편한 삶을 통해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분이 강력하게 나타나 나의 문제만을 해결해주시기를 원하죠. 그때 예수님이 성경 말씀으로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는지를 지적하십니다. 34절부터 36절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것은 시편 82편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맥락 자체가 사람들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사람들이 권세를 잘못 행세해서 심판당해야 함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섬기고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권력을 남용하였기에 그들이 결국 심판당할 자임을 이야기하는 맥락입니다. 심판 당할 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신적 존재인데 하물며 내가 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한 것이 뭐가 문제인가?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이 38절에서 뭐라고 얘기하시나요?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바로 앞에서 하신 일, 즉 날 때부터 맹인인 자의 눈을 띄우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었던 눈뜬 자는 어떻게 반응했었나요? 9장 32절에서 33절입니다.
9:32-33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하지만,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자가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다 믿을 수 있나요? 이 말씀은, 우리는 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언젠가 은혜를 받았을 때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눈이 떠진 것입니다. 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인간적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이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내가 살아나게 되었구나’ 인정하며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해서 성숙한 믿음이 단숨에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고도근시자가 안경을 벗으면 보이는 것처럼 눈을 떴지만 뿌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상상하는 예수와는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은혜를 받고 집안이 점점 잘 되고 행복할 날들만 상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했습니다.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수치와 말도 못할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어릴 때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부도가 시작된 그 첫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면 모든 일이 변했을까? 그러나 지금은 절대 막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인해 저와 저희 가족은 하나님이 정말 누구신지 알게 되고 맹인의 눈이 밝히 띄어진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인생에 큰 일만 생기면 나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던 기복적 수준에서, 이 땅의 풍요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선물은 우리가 이 땅에서 피하고 싶은 일들을 통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 설교를 듣다 보면, 절에서 하는 얘기나, 세상 사람들 방송에서 하는 얘기나 같은 얘기를 왜 목사가 할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가짜 하나님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십 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이겠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이 ‘망함’의 축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눈을 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한 가짜 예수가 아니라 진짜 예수님 믿고 의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망한 인생이 영적으로 가장 큰 축복이며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참 예수를 섬기는 자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강하고 능력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도록 일하시는 중입니다. 이 예수를 바로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