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사람이 죽으면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는 두세 시간 만에 나타나는 ‘사후 이른 변화’와 열두 시간 이후에 나타나는 ‘사후 늦은 변화’로 나뉩니다. 사후 이른 변화로는 몸이 돌처럼 굳는 것, 괄약근이 느슨해지면서 대소변이 흘러나오는 것, 혈액순환이 멈추며 피가 몸에 고여 멍이 든 것처럼 군데군데 푸르게 변하는 시반 증상 등이 있습니다.
열두 시간이 지나면 부패가 심하게 진행됩니다. 면역체계가 붕괴되면서 박테리아와 대장균이 몸 전체로 퍼져서 썩게 만들기에 하루만 지나도 시체 썩는 냄새로 다양한 종류의 사체 곤충들이 모여듭니다. 그 중 파리는 몸의 구멍마다 400여개의 알을 낳고, 이 알은 반나절 만에 번데기로 부화하고 일주일 후 파리가 되고, 사람이 죽은지 약 2, 3주 후면 뼈만 남게 됩니다.
요즘 같은 냉동시설이 없던 고대 근동의 더운 기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누가 죽었고 시체가 부패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지났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4일이 지났다면 몸은 썩고, 수만 마리의 구더기가 온몸을 파먹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는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을 돌무덤에 넣었다가 1, 2년뒤 무덤을 열어 뼈를 회수하여 가족의 뼈를 담는 장소로 옮겼습니다.
성경에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이 왜 기록되었나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예수를 믿었다고 보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는 분이심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죽음만을 두려워하고 또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적 죽음보다 더 무섭고 영구한 영적 죽음을 강조하며, 육체는 살아 있지만 영원히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한 자들을 ‘죽은 자’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잠자는 자와 죽은 자가 나옵니다. ‘죽은 자’는 예수를 알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한 세상 사람들로, 영적인 눈으로 보지 않으면 살아 있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무리는 ‘자는 자’입니다. 죽지는 않았으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 죽은 자와 크게 구분이 안 되는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생명이 그 안에 풍성하게 나타나지 않기에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이 죽어있는 자는 사실, 육체가 죽은 시체와 유사합니다.
첫 번째로 육체가 죽으면 몸이 굳어서 반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산 자는 말씀에 감동도 느끼고 은혜도 받고 반응하는데 영이 죽은 자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또한 시체가 죽으면 부패한 냄새를 풍기듯 영혼이 죽으면 더럽고 추한 냄새를 풍깁니다. 가까이서 지내는 사람이 항상 이기적이고, 늘 화를 내고, 입만 열면 비난과 원망과 멸시의 말을 뿜어낸다고 상상하는 것조차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시체가 뿜어내는 냄새입니다. 그런데 시체의 더러운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들듯 인간에게도 파리와 같은 더러운 영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분노할 때, 분노의 영이 그 사람의 영을 지배해 스스로도 왜 그렇게 화내는지 알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화를 내도록 몰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쾌락을 추구할 때, ‘재밌다, 즐겁다’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영이 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때까지 몰아갑니다.
인간 영혼에서 뿜어 나오는 영혼이 썩은 내를 맡은 더러운 영들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파괴적으로 몰아갑니다. 육체가 죽고 썩어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더러운 영의 놀이터가 되어 죽어가는 영혼을 보며,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절한 간구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오셔서 나사로를 당장 살리지 않고 왜 마르다와 마리아와 대화를 하셨나요? 이들에게 견고하고 온전한 믿음을 심어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전한 믿음 이후에 나타나야 합니다. 기적을 본 뒤 생기는 감정은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충격을 받고 놀라며 환호하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을 가진 뒤, 믿음대로 일이 일어난 것을 본 자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예수님을 높이며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온전한 믿음을 배워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일에 증인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죽은 자의 부활을 볼 수 있나요.
어떤 믿음이 죽은 자의 부활을 볼 수 있나요?
1.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vv.20-24, 28-32
첫 번째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러 달려 나간 마르다는 열심히 섬기며 뛰며 애쓰는 행동파, 요즘의 MBTI로 보자면 외향성 E의 사람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 듣는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 마음에 공감하는 MBTI 내향성 I에 해당하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성격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실망감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을 섬길 만큼 사랑이 많은 자입니다. 왜 사랑했나요? 예수님이 놀라우신 분임을 믿고 경배의 대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기의 가장 큰 필요인 오빠를 살리는 일에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 실망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똑같은 말로 반응합니다. 21절을 보시면,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시몬을 불치병인 문둥병에서 낫게 해 주신 예수님이 오빠도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나사로의 아내도 언급되지 않고, 삼남매가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은 20대 전후로 유추되는 어린 남매들입니다. 마리아도 32절에 똑같이 반응합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일부러 부르시자 마리아는 그제야 나와 이 말을 합니다. 이 말에서 이들의 믿음이 조건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인가요? 예수님은 병자는 치료하시지만 죽은 자는 살리실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병자가 계신 곳에 오셔야만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두 가지가 다 잘못된 조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말씀만으로 병을 치료하십니다. 조건적 신앙은 무엇에 근거하나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불신앙에 근거합니다. 그 증거가 22절에 있습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언뜻 들으면 믿음 같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조건적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분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그냥 부탁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분, 사랑이 많은 분, 위대한 분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신 분, 구약에서부터 보여주었던 전능하신 분, 세상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도 죽은 자가 살아났던 일이 몇 차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살려냅니다. 열왕기상 17장 17절부터 24절을 보시면
왕상 17:17-24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놀라운 일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살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확신이 없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엘리사에게도 똑같은 일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32절부터 34절을 보시면,
왕하 4:32-34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이에게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생명의 기운을 아이에게 전달해 주려는 마음으로 아이와 몸을 붙이며 기도했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가 살아날 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기도의 결정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간절한 상황입니다. 두 사람에게 헌신과 은혜를 베푼 이들의 소중한 아이들이 죽었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23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선포하십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렸던 아이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심장이 멈춘 줄 알고 영안실에 넣었는데 몇 시간 지나 다시 심장이 뛰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상황이 다릅니다. 서론에 이야기한 ‘사후 늦은 변화’가 일어나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냄새가 나서 무덤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르다가 어떻게 반응했나요? 자기가 아는 최선의 신학적 지식으로 24절에 반응합니다.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것 역시 믿음의 반응 같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반응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나중에 살아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겠지. 그때가 부활의 때인가 보다’라고 정리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을 볼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으신다면 삶에서 반드시 다른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나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분들은 특별히 자녀 세대를 보며 답답할 때가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낙심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살리실 수 있음을 알고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있다는 건 내 노력으로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길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반응처럼, 온전한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아니하며 여러분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회를 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어떤 믿음이 죽은 자의 부활을 볼 수 있나요?
2.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vv.25-27
두 번째로 어떤 믿음이 죽은 자의 부활을 볼 수 있나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25절 상반절입니다.
[25a]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예수님이 부활이나 생명의 능력을 전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난 자에겐 반드시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 변화의 이야기가 25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25b]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는 육적 죽음입니다. 육적으로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영적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살려내신 나사로가 아직까지 살고 있나요? 아닙니다. 수십 년 살다 죽었겠지요. 인간은 다 죽습니다.
성경은 육적 죽음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마치 입었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처럼, 하나님이 한계 지어주신 이 땅에서 육신이라는 옷을 입었다가 생명을 얻으면 육신을 벗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26절 상반절입니다.
[26a]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살아서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자는 육적으로 죽어도 예수님은 그것을 죽음이라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제일 중요한 것은 생명의 유무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생명의 반응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고 생명이 없다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영적 죽음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 관계 맺는 유일한 길이 바로 26절 하반절에 쓰여 있습니다.
[26b]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손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 손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누군가 목이 말라서 물을 주려면 그릇이 필요한데 믿음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며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이라는 그릇이 필요한데 이것마저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만들어내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왜 마르다에게 이 과정들을 밟아가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셨나요? 온전한 믿음의 반응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마르다가 27절에 고백합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안에 모든 고백이 다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왕이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면 아들이 왕과 동등한 능력을 가지듯,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면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전능하시다는 고백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으로 인해 좋으신 분, 병 치료하신 분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고백이란 무엇인가요?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것이라고 구약성경 전체가 예언하던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놀라운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안타까운 반응이 나타납니다. 몸이 썩어서 구더기가 파먹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를 안 믿던 사람도 믿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나서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11장 48절과 53절을 보시면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미국에서는 살인을 1급과 2급 두 종류로 나눕니다. 2급 살인은 충동에 의한 것입니다. 싸우다 화나서 밀쳤는데 죽었을 경우, 갑자기 분노에 사로잡혀서 사건이 일어난 경우, 이런 경우는 형이 낮습니다. 그러나 악질적으로 누군가를 제거하려는 살해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세워서 누군가를 죽였을 때 이것은 1급 살인입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동적인 미움으로 죽이고자 했다면 이때부터 모의를 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합니다. 어떤 사건 이후인가요? 썩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을 목도한 이후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와 믿음 없는 자의 반응입니다.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까요? 아닙니다. 복종하는 척하는 가짜들이 많이 늘어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소망 없던 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나고, 예수님 뿐입니다! 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오히려 눈을 뜨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악세사리에 불과한 사람들 얼마나 많이 늘어나고 있나요?
어떤 교회는 교인 3,4천 명 중 80%가 5,60대 이상이고 30대 집사는 수십 명뿐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은 신앙으로 헌신하셨는데 자녀세대들이 하나님에 무관심한 이 한국교회의 현실이 죽은 자입니다. 지금의 20대는 약 10%만이 종교에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즐겁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리의 열심으로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낙심하지 않고, 화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믿으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믿음이 생기도록 마르다와 마리아를 가르치셨던 것처럼 여러분 또한 이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이심을 믿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