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이 나사로 집에 오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아닌데 왜 나사로를 살리시려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을 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 …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냄으로 사람들이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실 그 분을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한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얼마 후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 땅을 떠나셔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을 주시고자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며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나사로 집에 모인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실 이 일을 믿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던 마르다조차 이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죽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입니다. vv.33-37
첫 번째로 죽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입니다. 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운 사람은 바로 앞 절의 마리아를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32절에서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엄청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기대한 대로 예수님이 빨리 오셨다면 이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자 예수님을 보며 눈물이 터진 것도 당연합니다.
함께 있던 유대인들도 젊은 나이에 죽은 나사로를 위문 왔다가 동생들과 함께 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33절 하반절을 보시면
[33b] …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비통히’는 번역하기 어려운 특별한 단어입니다. 원래의 뜻은 심하게 분노하는 감정 때문에 마음이 요동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보통 우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마음이 화가 나신 상태입니다. 화를 다스릴 수 없어 마음이 요동하는 상태, 그것을 ‘비통히 여기다’라고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학자들은 왜 성경이 이 단어를 썼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화가 나셨을까요? 화가 심하게 나서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할 정도일까요? 예수님은 바로 나사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죄와 사망의 강력한 영향력, 또한 죽음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시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죽음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다양한 고통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회복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한동안 가슴이 아프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면 괴롭지만 회복되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망해서 절망하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온 몸이 부서지고 마비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바로 지난주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텍사스의 한 고등학생이 초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스물 한 명이 죽었고 그 중 그 학교에서 30년 동안 가르치신 한 선생님도 계셨는데, 그만 그 남편분도 이틀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나 심근경색을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서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사실 육적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요?
성경은 ‘죄가 죽음을 가져온다’고 이야기 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예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울고 있는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인생을 살며 우리 또한 죽음과 죄의 파괴적 결과를 겪습니다. 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은 그래서 육적 죽음을 겪기 전에 영적 죽음의 현상을 끊임없이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결혼하고, 사랑하기 위해 자녀를 낳고, 사랑하기 위해 교회에 모였는데 죄가 만들어내는 악한 영향력은 사람들로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고 지적하고 미워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죽음이 풍기는 영향력입니다. 육적 죽음보다 무서운 영적 죽음의 영향력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죄가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 그리고 그 힘에 사로잡혀 있는 무기력한 사람들에 대해서 비통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영적 죽음의 현상들로 인해 좌절하고 우울하고 결국에는 믿음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그때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34절과 35절입니다.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절은 영어로는 딱 두 단어, Jesus wept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짧은 구절이나 그 안에,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지만 죄에 사로잡힌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부모가 기대하지 않는 악하고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죄악된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온전한 존재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만드신 존재에게 죄가 들어와 결국 죽음이 찾아왔고, 그 죽음의 영향력으로, 좀비처럼 살아가는 인간들. 하늘나라와 영광은 보지 못하고 자기 욕망으로 남을 파괴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비참한 좀비들의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이 울고 계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36절에서 한 무리는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사랑하셔서 우시는구나 라고 생각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37절에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빈정거림과 조롱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죄에 사로잡혀 눈이 어두워진 결과, 죽음의 영향력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 또한 하나님에게 이렇게 반응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가장 완벽한 때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것을 늘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은 때라도 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당장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솔직히, 문제가 있을 때마다 도와주시고 인생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신다면 아마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거나 의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망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아시며 미래도 아시기에 인생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개입하여 바로 거기에서 구원의 은혜와 개입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믿음 없는 반응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38절 상반절을 보시면
[38a]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죄로 인해 하나님이 대해 믿음을 없게 만든 것을 보시며 예수님은 또 ‘비통히’ 여기십니다. 우리 또한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인생이 개입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 되고 싶은 마음이 잘려져 나가며 어떤 상황에도 감사로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바로 예수님처럼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질이 우리 안에 갖추어 있지 않으니까 이 죽음의 영향력이 다양한 부정적 감정으로 튀어나오며 관계를 깨트리게 됩니다. 미성숙하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가 바로 죽어서 썩어져 가는 나사로가 풍기는 냄새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도 이기실 수 있음을 믿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행한 힘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옳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인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 때문입니다. vv.38-44
두 번째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 때문입니다. 38절 하반절과 39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38b] 예수께서 …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a]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유대인들은 돌무덤에 시체를 안치했다가 1, 2년 후에 뼈만 추려서 가족의 납골당에 함께 장사를 지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더운 날씨에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면 이미 수만 마리의 구더기가 몸을 파먹기 시작해서 몸이 부패하고 썩은 내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39절 하반절에 대답합니다.
[39b] …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이성적 반응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을 통해 결정하며 평생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보이지도 않고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영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보이는 세상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이성적 존재들에게 갈 길을 가르쳐주며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이 돌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반대합니다. 지금 반대하는 마르다가 조금 전에 어떤 고백을 했는지 27절입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전체가 예언하던 그 메시아라고 온전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일은 믿지 못합니다.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도 진심으로 믿음을 고백하고는 바로 다음 순간 믿음 없는 자처럼 행동합니다.
믿음의 고백이라는 건 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 차원이 우리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련회 때 한 번 은혜 받은 모습으로는 항상 살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복음을 배워나가고 적용하며 예수가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질에서 뼈저리게 깨닫는 지루한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이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충돌하는지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옳습니다’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드러나는 놀라운 영광. 그 믿음을 발휘해야 되는데 이성이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며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 때마다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대로 돌을 옮깁니다. 41절 상반절입니다.
[41a] 돌을 옮겨 놓으니 …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41절을 하반절과 42절 상반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1b]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a]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예수님과 하나님은 뜻이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그 뜻대로 늘 반응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가 다 응답이 될 것입니다. 이 당연한 것을 왜 말로 하셨나요? 42절 하반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42b] …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 뜻이 하나님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 곳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43절에 말씀하십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무덤에 들어가 썩어버린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하셨고, 그 결과가 44절입니다.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사람이 죽으면 몸이 뒤틀립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서도 베로 몸을 꽁꽁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나사로는 아마 몸이 동인 채로 나왔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모습인가요! 썩어버린 자가 말씀으로 살아나 나왔습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나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도록,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그러나 육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재연되지 않습니다. 육적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요? 영적 죽음입니다. 죄가 만들어낸 영적 죽음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영적으로 죽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영적 죽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나요? 썩은 냄새가 나는 다양한 감정들, 비교의식, 미움, 분노, 짜증, 지적 등 이것은 모두 죽음의 영향력입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영혼에도 죽음의 냄새가 진동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 죽음의 냄새가 가장 심하게 났던 때였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나흘 만에 나오라고 하셨지만, 저에게는 2년여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자아가 죽고 하나님 외에 아무 소망이 없다고 고백할 때 그 때 하나님이 불러 내셨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때였습니다. 돌무덤마저도 하나님이 은혜의 장소라고 받아들이자 하나님이 부르시고 개척하라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신 증거입니다. 죽은 자와 같은 저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만드신 사건처럼, 여러분도 무덤 같은 시기를 지나실 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실 때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름에 일어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함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