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이것을 직접 보았다면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 같은데 사람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45절에 나와 있습니다.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물론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통한 믿음은 예수님께 나오게 만드는 시발점은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온전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는 것을 의존하여 확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예수님이 천시하던 사람들이 이 일로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면 기적의 역할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보고 정반대의 반응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6절입니다.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단순히 ‘기적이 일어났다’고 알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엄청난 결과를 불러 올 것을 알았기에 바리새인들에게 조치를 취하라고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이 반대되는 반응의 근원적인 이유를 예수님은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0장 25절과 26절을 보시면
10:25-26 [25] …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은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와 개입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그것은 영적 차원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적 차원에서 열심을 낸다고 믿음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기적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나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두려움 때문입니다. vv.47-48
첫 번째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47절 말씀입니다.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대제사장은 한 명인데 이전의 대제사장이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회는 약 70여명으로 형성된 예루살렘 공의회로 이스라엘의 모든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에 대해 재판을 하는 최고법정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데 이들이 모여 어떠한 의논을 하나요?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놀라운 표적을 행하는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결정해야 일반적일 것 같지만, 이들은 예수가 자기들에게 문제거리를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8절 상반절을 보시면,
[48a]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들이 그때까지 누리고 있던 종교적 지위와 이익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백성들이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임시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법을 열심히 지켜서 복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며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다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항상 전부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자들, 죄를 인정한 자들 대신 양과 소를 바치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용서와 구원의 그림을 가르치도록 임시로 종교 지도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지키시고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됨을 모형으로 가르치라고 하신 것인데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 모형이 필요 없게 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가 빼앗길까봐 두려워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시스템 안에서만 살 수 있는 나라에서 그 시스템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사두개인들이 키운 동물로 제사를 드려야 했으며, 또한 사두개인들을 통해서만 환전을 하여 성전세를 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가 주어졌고 그 돈을 로마에 헌납하며 그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위해 율법을 지켰습니다. 명예는 돈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사람들이 거룩하신 분이라고 인사하고 존경받는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기며 지켰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존경하지 않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이 누리는 부와 명예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절박해 진 상황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나요. 48절 하반절입니다.
[48b] …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이들은 이미 나라를 빼앗긴 지 오래였습니다. 식민지로서 내는 세금의 대부분은 로마가 가져가고 있었고, 로마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당’은 테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대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라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인가요?
로마에게 뇌물을 주고 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지위가 유지되는 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나라를 빼앗기게 만들 잠재적 반역자’로 몰아간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합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옛날에 살았던 나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근원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본질을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왜 하나님을 거부하나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죄인입니다’ 한번 고백하고 그 뒤부터 교회 출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고백 후 바로 하늘나라에 가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이 땅에서 인생의 여정을 살게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근원 안에서는 솔직히 내가 꿈꾸고 원하는 삶을 예수님이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갈등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자기 나라라고 생각하며, 여기서 많은 것을 누리고, 더 성공하고, 더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세상과 친밀감을 느끼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누구나 물질에 대한 의존과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다면 이런 틀이 깨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나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고,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좋지 않은 것, 힘든 것, 어려운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악이 만들어 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자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며,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두려워서 순종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무엇인가를 붙들며 살아가면 결국 그것이 더 큰 고통과 갈등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준비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아프리카로 선교를 나가라거나 갑자기 원수를 사랑하여 너 자신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실까봐 가장 두려우신가요?
만약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라는 말씀 앞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던 청년처럼 마음이 무겁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돈으로 인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가져오는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면 여러분의 미움이 여러분은 옭아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인생에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하는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갈등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으로 인해, 두려움을 내려놓고 순종을 배웠더니 오히려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 제 두려움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던 평안과 복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두려우신가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어 간구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은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성장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내려놓을 때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때에 두려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은혜를 누리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욕망 때문입니다. vv.49-53
두 번째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49절에 보면 욕망 때문입니다.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자신만 답을 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 알고 있나요? 50절입니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한 명만 죽이면 쉽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이 시대 최고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세워진 대제사장의 입에서 ‘하나님’을 죽여 유익을 취하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서운 욕망입니다. 왜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나요? 한 가지는 물론 앞에서 말한 자기 이익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가난하고, 힘없고, 별것 아닌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도는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을 압도할 외모와 능력을 기대했고, 예수님이 오신 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메시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숭배하나요? 자기 내면의 욕망과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을 열망하고 숭배합니다.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그 분이 초라하고 볼품없다면 그를 죽여서라도 그 분이 내 메시아이길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해 죄를 해결 받고 참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일이 잘 되고, 부유하게 되고, 건강하게 된다고, 그렇게 기독교를 소개받기도 하지만 그 시작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도 예수님을 문제 해결자로만 보고 있다면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예수님이 드러나시면 결국 예수를 거부하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모두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51절과 52절입니다.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미리 말했다’는 것은 예언입니다. 예수를 죽이자고 말한 것이 예언이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과 두려움을 인해 때로 신을 만들어 내고, 때로 신을 거부하고, 때로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사용하셔서 욕망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나요? 53절입니다.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전까지는 충동적으로 죽이려고 했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계획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우리 안에 있는 깊은 두려움과 욕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마주하고 극복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다면 ‘예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좋은 분’이라고만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문제마다 누군가 해결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정한 축복이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자녀가 문제에 처했을 때 부모가 능력이 있어도 때로는 돕지 않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처리해 준 아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진짜 도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더 큰 축복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시더라도,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축복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축복임을 깨달아 참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