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를 채우고 있는 강렬한 욕구이자,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의 근원입니다. 사람은 왜 사랑 없이 살 수 없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 안에서 온전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관계적 속성인 사랑을 하나님이 인간 안에 동일하게 만들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죄로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할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인간은 창조의 목적과 모습을 회복할 수 있고,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1.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vv.1-8
첫 번째로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본문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또한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씀을 통해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임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왜 잔치가 벌어진 것일까요? 바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잔치가 나사로의 집에서 벌어진 것으로도 보이지만 마태복음 26장 6절을 보시면
마 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
나사로의 아버지가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몬이 나병으로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소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 예수님의 기적의 은혜를 경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 나병환자였지만 지금은 치료되어 집에서 잔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어떤 일을 하나요? 3절을 보시면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잔치 중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 향기 나는 기름을 몸에 뿌리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낯선 광경입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향기 나는 비싼 기름을 손님의 머리에 뿌리거나 그것으로 발을 닦아 주는 것이 손님을 향한 최고의 대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 근’은 약 0.5리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양은 한 사람이 평생 써도 남을 엄청난 양입니다. 나드는 원래 몰약을 만드는 원료인데 이 몰약은 당시 존재하는 모든 향 가운데 가장 강력한 향을 내는 것으로 주로 시체 썩는 냄새를 막고자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나드’는 인도에서 나는 식물로 이 ‘나드’ 기름을 압착해서 몰약을 만들었습니다. 이 몰약을 감람유에다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아주 향기로운 기름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순수한 몰약을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기름의 값어치를 가룟 유다가 300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지금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 옥합은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천 만 원짜리 향수병을 깨트린 것입니다.
어린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비싼 향유 기름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으로 미리 유산으로 물려준 것이 아닌가 유추됩니다. 시몬이 문둥병에 걸리고 나서 자기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딸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향유기름은 마리아의 미래를 보장하는 중요한 목돈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려면 지참금이 많아야 좋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비싼 향유는, 그에 합당한 신랑감을 만나 부끄럽지 않은 결혼을 할 미래의 준비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지금 그 미래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기름이 그렇게 많으면 여러 번 나눠 사용해도 되는데 왜 단번에 깨트려버렸나요? 지금 마리아 안에서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마리아는 최근 오빠가 죽었다 살아난 것을 목도했습니다. 죽음이란 한 존재를 완전히 파괴해 어떤 사람과도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고, 의존할 수 없는 절망적인 힘입니다.
아마 마리아는 오빠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오빠를 의존하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오빠가 죽고 나자 모든 의존이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깊은 허무와 절망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남들처럼 ‘신기하다’고 놀란 차원이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미래를 보장하던 향유에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는 내적 가치의 변화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가치시라고 믿는다면 우리 삶에도 그러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도 나를 보장하고 책임질 많은 것들을 의존합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하고 은혜를 받았더라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존하게 됩니다. 매일 돈을 써야 하고 그 돈에 따라 결정이 달라지고, 또는 사람으로 인해 미래가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 대상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견고해 보여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면 더욱 심할 것입니다. 가장 쉽게 의존하는 대상이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많은 실망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리아도 자기 오빠의 죽음을 통해, 또한 그것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곳에서 영적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0장 25절과 26절을 보시면
10: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분이시며 그분만이 영원하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시하는 사람만 이 말씀을 진짜 의존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사실 영혼 안에 깊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잠잠케 할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에게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은 향유 옥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훨씬 가치 있고 확실한 예수님을 만나자, 더 큰 가치를 위해 작은 가치를 버릴 수 있는 용기이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내가 의존하는 대상이 미래를 오히려 어둡게 만들고 고통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게 고민하고 두려워했던 일들이 사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참 성도라면, 우리가 의존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예수님만이 진정 우리의 의존의 대상이심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축복이며 마리아가 경험한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경험해야만 내가 쥐고 있던 것을 자유롭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돈을 의존하는 사람에게 ‘돈을 믿지 말라’고, 사람을 의존하는 사람에게 ‘사람 별 거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이것은 영적인 사로잡힘이기 때문에 스스로 떨쳐 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죽음 같은 힘 앞에서, 예수의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경험한 사람만, 목숨 같은 향유 옥합을 깨트릴 수 있게 됩니다.
옥합을 깨뜨렸더니 성경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합니다. 한 방울만 찍어도 시체 썩는 냄새를 없앨 수 있는 강력한 향유를 0.5리터나 깨뜨렸으니 향이 진동했을 것입니다. 외출하시기 전에 향수병을 깨트려서 부었다고 생각만 해도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왜 기록했을까요? 바로 다음 절에 아름다운 향과 반대되는 더럽고 추한 냄새가 진동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4절부터 6절입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무엇이 악취인가요?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은 자기만 알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욕구만 취합니다. 내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상처 주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심지어는 파괴하고 죽이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살아갑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 사랑이 강력했습니다. 자기 사랑의 두 가지 결과가 본문에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물질을 도구화합니다. 물질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돈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문제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할 때입니다. 주변 사람을 도구로 쓰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관계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를 선택하여 3년간 사랑해주고 기적과 말씀으로 양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고대에 랍비가 제자를 택했다는 것은 양자를 들인 것과 같았습니다. 스승을 섬긴다는 것은 스승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며, 스승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스승처럼 살고 스승처럼 죽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런 예수를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팔아버립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내 맘에 들지 않으면 팔아버리고 배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강력하면 또한 자기에게 손해가 날 때 극도로 분노하며 비난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병행부문인 마태복음 26장 8절에 이 사건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물론 대표는 가룟 유다였지만 다른 제자들도 단체로 분노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수 천 만원을 낭비한다면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돈이 아까웠던 다른 제자들과 가룟 유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화를 내고 마리아를 비난한 이유는 돈을 훔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 돈이 자기한테 들어왔으면 그걸 팔아서 일부를 챙길 수 있었을 텐데 손해가 현저하게 보이자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주 화가 나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자주 비난하며 공격하고, 왜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악취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 안에 다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처럼 내게 손해가 되는 일에 분노하며 비난하고 원망하지 않나요? 우리도 내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나요? 이 자기 사랑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중세의 수도사들은 자신을 때리면 자기 사랑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인 마틴 루터는 죄책감이 들 때마다 채찍으로 온몸을 때리고 비명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때려도 자기 사랑이 없앨 수 없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 만났나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는 만큼 자기 사랑은 줄어듭니다. 지금 자기사랑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적어서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져야 나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줄어들며 하나님의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마리아처럼 매일매일 살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악취를 풍기는 인생이 아니라 아름다운 향기를 채우는 인생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 하신다면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시며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2. 낮아질 수 있습니다. vv.3, 9-11
두 번 째로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낮아질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
향유 기름은 머리에 붓도록 되어 있었고,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26장 7절에도 머리에 부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머리에 부었는데 향유가 흘러서 몸을 적시고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원래 귀한 손님이 오시면 감람류를 준비했다가 몰약 같은 향수를 한 방울 정도 섞어서 손님에게 살짝 발라드리는 것이 부잣집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아는 너무 많은 양이어서 머리에 붓고도 남아 발에까지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놀라운 일을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하인들이 발을 씻기고, 발에 물기가 있으면 흙과 먼지가 또 묻으니 닦아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물이 아니라 충분한 기름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수건 대신 자기 머릿결로 닦은 것입니다.
머리털은 성경에서 사람의 영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광은 한 존재의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가장 더러운 발을 닦음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드렸습니다. 나의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으로 예수님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닦아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예수를 높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어떤 존재를 최고의 존재로 높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존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할 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전한 사랑이 회복되면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라고 하셨는지 마가복음 10장 43절과 44절에 쓰여 있습니다.
막 10:43-44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원리는 이 세상의 원리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면 멋진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낮은 자리에서 높고 가치 있는 존재를 섬기며 그 존재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해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어지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서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높여드릴 때, 그래서 내가 낮은 자리에 내려가게 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자기 사랑은 집요하게 우리를 어떻게 만드나요? 10절과 11절입니다.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이들은 이미 전임과 현직 대제사장들입니다. 당시 최고 종교 지위를 누리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위가 위협을 당하자, 예수뿐 아니라 관련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높아지려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도 여전히 대제사장들과 같은지도 모릅니다. 이런 태도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물론 능력도, 기질도, 역할도 다르고, 어떤 사람이 잘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사랑의 대상으로 서로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사랑이 왜 중요한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우리가 낮은 자리에 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과 1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일 4:10-11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 자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복음서에 기록하게 하시면서 마태복음 26장 13절에 이야기하십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을 잘 모르면, 여자가 비싼 것을 드렸기 때문에 기록하라고 하셨다고 생각하거나 성도도 비싼 것을 드려야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온전한 사랑을 하게 되는 ‘복음’의 대표적인 예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사랑해야 가룟 유다의 악취가 풍기던 자로부터 복음이 만들어낸 사랑의 향기를 풍길 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기 사랑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