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혹은 왕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아주 반전됩니다. 바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일이 예루살렘 바로 옆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곧 유월절이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흥분해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사람들은 이제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7절과 1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한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하러 왔다가.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직접 본 사람들이 그 소문을 퍼트리자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백성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할까봐 처음에는 차라리 나사로까지 죽여 버리자라고 했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되면서 ‘소용없어. 이미 늦었어. 큰일 났다’ 라고 말하며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시간적 배경을 오늘 본문 12절 상반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2a]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
이 명절은 유월절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 맞추어서 죽음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으로 이때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유월절에 행하셨던 양의 피를 문설주의 바른 사람만 살아났던 놀라운 구원의 모형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시키시고자 한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12b] …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그랬더니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13a]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종려나무라고 번역된 이 나무는 원래 대추야자열매나무입니다. 물론 종려나무나 대추야자열매나무나 우리가 볼 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시면 이 대추야자열매나무가 10미터에서 20미터까지 크게 자라며 사시사철 시들지 않고 푸르게 뻗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대추야자 열매를 많은 곳에서 파는 것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 대치야자열매의 이파리를 뜯어다가 예수님을 맞으려고 하는 것인가요?
구약 성경을 보시면 이 나무가 사시사철 잎이 시들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 나무는 바로 전쟁의 승리의 상징으로도 사용되던 그런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승리자와 환영한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또한 대추야자열매나무와 같은 강력한 생명력과 능력이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는 기대로 이 나무 이파리를 흔들고 깔며 지금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무슨 의미인가요? 원래 시편에 나오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시편 118편 25절을 보시면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
‘이제 구원하소서’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호시아 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호시아가 구약의 여호수아나 호세아와 같은 뜻으로 헬라어로는 예수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의 동사형으로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하며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이 무엇에 대한 열광이었을까요? 구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어떤 구원이요? 일차적으로 이들은 로마의 압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한국도 오래 전에 일본에 의해 한일합방이 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분들은 대한민국이 독립에 대한 강한 열한 열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생명을 내놓기도 하고요. 몇몇 분들은 자기 재산을 다 내놓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심지어 독립만 된다면 자신이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아도 자신의 인생을 바쳐 독립을 보길 원했던 분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런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상황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의해 지배당한 시간이 오래 계속되면서 한국분들 가운데도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으로 살고자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나쁜 친일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30년이 훨씬 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평생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사람 외에는 자신들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하던 선민의식이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열망하던 그 메시야가 오시면 이 나쁜 놈들을 다 때려잡고 결국 자신들이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를 왕으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13절을 하반절에서는 그들이 외치는 찬양이 이렇게 나옵니다.
[13b]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곳에 중요한 이들의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 누군가요? 메시야입니다. 구약성경은 언젠가 메시야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렇게 강력한 왕 한 분만 오셔서 그들을 다스려주시기만 하면 자기들에게 엄청난 유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평화와 번영이 찾아왔습니다. 그때까지 블레셋에 의해 그렇게 힘들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더 이상 고통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이 약속하는 그 약속이 이뤄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약속이 예레미야 23:5에 나옵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을 왕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분만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는 이방의 압제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현장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그들이 기대하던 그런 메시야가 아니심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나요?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나요?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때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물론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이 나귀는 아주 중요한 탈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왕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탈만한 그런 짐승이기 보다는 일상에서 실용성이 높은 그런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굉장히 길이 험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자체가 약 750m나 되는 엄청나게 높은 산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해발 250m 아래 있던 여리고로부터 시작해서 올라가면 1km를 계속 올라가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서울에서 아주 높은 산 중의 하나인 관악산이 700미터 안 됩니다. 관악산 한 번 등반하려면 두세 시간을 올라가야 됩니다. 좁고 포장되지 않은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나귀가 아주 유용했습니다.
성인 나귀도 키가 140센티 정도밖에 안 됩니다. 사람이 타는 등까지의 높이는 100센치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쉽게 타고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귀를 애용했던 이유가 아주 힘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겁도 많고 고집이 세서 오히려 이런 낭떠러지 같은 길에서 타기에는 훨씬 더 좋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서는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나귀를 예수님이 타신 장면은 폼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딱 어떤 장면을 연상하시면 되냐면 자전거를 안장을 내린 뒤에 거기 이렇게 엉거주춤 앉아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 예수님 발이 땅에 달랑 말랑하게 작은 나귀를 타고 지금 그 길을 올라오고 계신 것입니다. 큰 말을 타고 오셔서 위엄 있게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이런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이 모습에 대해서 마태복음 21:5은 다음과 같이 구약을 인용합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겸손을 보여주시고자 일부로 이런 나귀를 타셨던 것입니다.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그런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이런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 나귀를 준비하여 타셨습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나요?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이 이런 왕으로 모셨을 것이라고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은 대대로 왕이 자기 힘을 강화하며 과시할 때 사용하던 대표적 무기였습니다.
신명기 17장 16절을 보시면,
신 17:16 그(왕)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왕이 되면 군사적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왕이 되면 말들을 더 많이 준비해서 강력한 군사적 힘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말이 없으니까 말을 많이 키우는 애굽에 사람들을 보내서 거기에서 말들을 갖고 오게 했습니다. 마치 지금 탱크를 외국에서 사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강력한 힘을 가져야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백성들도 그 권세에 복종하고 또한 다른 나라에게도 그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 중요한 걸 하지 말라고 하셨나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왕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만을 의존함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겸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존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해 영향을 받거나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의 가짜 왕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짜 왕들은 말들을 통해 자기 힘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압살롬입니다.
삼하 15:1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한과 영향력을 확장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말들을 가지고 호위병까지 세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자인가를 뽐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따라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럼 사람들을 추종함으로 자신이 혜택을 받고자 하는 열망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호산나라고 외쳤던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이 그런 왕인 알았던 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난 그런 왕이 아니라고 어린 나귀를 타셔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지금 흥분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때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이 나귀를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멍에는 짐승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속박의 도구입니다. 특별히 멍에는 소 두 마리를 묶어서 밭을 갈게 할 때 사용합니다. 근데 이런 나귀도 멍에를 통해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주인이 뜻에 따라 움직일 수 한 것입니다.
멍에 메인 짐승과 같은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40일 금식한 이후에도 마귀가 와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40일 굶었으면 배고픈 게 당연하고 얼마든지 돌을 떡을 만들어 먹을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안 하셨나요? 예수님은 자신의 욕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고 떡을 돌로도 만들 수 있지만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실 수 있는 모습을 거기서 시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나요? 우리의 욕구가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시간과 돈과 열정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손해가 안 오는 만큼, 자신이 아깝지 않은 만큼, 자신이 불편하지 않은 만큼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고 강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통치를 베푸시나요?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통치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세트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상태인 겸손이 있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면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면, 그분이 진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걸 믿으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들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져오나요? 우리를 숙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이 땅을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 아내로 들어오면 겸손과 온유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무섭게 힘으로 때리면서 우리를 가르치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15절이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강력한 왕이 오면 사실 두려워해야 합니다. 강력한 권세를 가졌다는 건 무엇인가요? 백성들을 착취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죽일 수 있고 자기 욕망을 위해 얼마든지 노예로 삼고 자기 욕구를 위해 모두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습니다. 푸틴이 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밀어 넣어 계속해서 죽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이루겠다고 사람 생명을 파리 처럼 여기며 심지어 아이들까지 죽이는 무서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군마를 타고 오셨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힘을 의존한다는 것은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만일에 여러분도 교만하여 하나님 말고 세상의 힘을 의존하면 반드시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이런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사람들을 이렇게 통치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람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삼상 8:10-17 [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 [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 [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이런 모습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고 의존하면 돈이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돈은 큰 힘을 주는 만큼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이 만큼의 돈을 줄 테니까 가족을 희생하고, 네 인생을 희생하고, 네 건강을 희생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희생할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그 힘을 따라가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힘을 따라가면 계속 보상은 줄 것입니다. 그러데, 한 번 노예가 되면 그 강력한 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힘을 왕으로 섬기며 사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너무 피곤하다. 너무 힘들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고백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와 안식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 절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해 로마로부터 자유를 얻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로마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졌나요? 아닙니다. 로마는 그 이후로도 천 년이 넘게 계속 건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후로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아주 망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살리시는 왕이십니다. 세상에 이런 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왕은 다른 사람이 다 죽어도 혼자 살아남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안 그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쉰ㅁ은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갈대를 보시면 중간 중간에 마디가 있습니다. 그 마디 중 하나가 중간에 꺾이면 거기로 물과 영양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꺾어져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꺾인 부분이 눈에 거슬리니까 그분을 부러뜨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대가 상해서 꺾어져 있어도 그걸 잘라버리지 않는다는 하십니다. 또한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원래 이스라엘에서는 호롱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거의 다 떨어지면 마지막 남은 심지의 불꽃이 신호를 보냅니다. 불이 꺼질 때는 연기가 막 나기 시작하면 손으로 심지를 잡아 꺼야 연기가 안 납니다.
우리 인생이 어떤가요? 마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연기만 뿜어내며 계속 악을 토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몇 분을 그렇게 타다가 꺼지겠지만 인생은 수십 년을 악취를 풍기며 꺼져갑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 푹 눌러서 꺼버리면 좋을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왕의 통치입니다.
또한 우리는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생명이 흐르지 않아 지금 온 존재가 썩고 있습니다. 멀쩡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살려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살려주시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입니다. 이 땅에서 로마의 압제당하는데서 구원하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이랑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쁨이며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겸손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온유가 있어야 하빈다. 만일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싫다면 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천국이 지옥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11장 28-29절을 보겠습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따라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이곳에서도 안식을 맛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온유와 겸손을 배워 안식을 누리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예수님처럼 왕이 돼서 세상을 통치할 수 있습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예수님을 믿어 죽은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천년 동안, 즉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세상에서 제사장적 왕이 되어 섬긴다고 합니다.
이 약속은 이미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습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의 가난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런 자가 또한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심령을 가지게 되면 이런 자에게 하나님이 통치할 땅을 주십니다. 이 땅을 여러분도 다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교회 사람들, 직장 사람들이 여러분이 온유하고 겸손한 왕으로 통치할 대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섬기며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해 가는 것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