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또한 자신은 빛이며 세상은 어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의 영향력인 어둠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결국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34절은 어둠의 영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이들은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관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메시아는 영원히 통치하신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간 이후에 벌어질 일을 말씀하셨더니, ‘당신이 메시아라면 영원히 통치한다는 메시아가 왜 하늘에 올라가는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되묻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빛과 어둠에 대해 35절에 말씀하십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시고 승천하셔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시니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있을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어둠에 붙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바로 세상이며 마귀의 영향력이며 죄가 강력한 모습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초월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빛, 어둠’ 중 하나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아래 살지 아니하면 어둠인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마귀의 노예가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인생을 살면서도 내가 왜 살아야 하지? 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 공허와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지 못하면 좌절하고, 원하는 결과를 성취해도 금방 허무감에 빠집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마지막 초대를 하십니다. 36절입니다.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이 떠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하시기 직전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어둠에 강력히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바로 그 존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것은 결국 빛이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어둠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에게 마지막 초대를 하신 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갖기 위해 숨으십니다. 결국 예수님이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어둠에 사로잡힌 결과는 무엇인가요?
1. 완고한 마음으로 사람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vv.37-43
첫 번째로 완고한 마음으로 사람의 영광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37절 말씀입니다.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것이 요한의 결론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기심으로 다가와서 마치 믿을 듯이 행동했지만 실제 이들은 어둠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있었고, 성경은 이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 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목격하고도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 같습니다만 성경은 계속해서 어두움이 빛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입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마치 눈이 퇴화하고 촉각만 발달한 심해어처럼, 어둠이 익숙하고, 빛이 없이 사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상태,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은 지으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는데 이제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퇴화하고,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아름다운 영광 대신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어둠에 사로잡힌 인생의 전형적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학력으로, 돈으로, 지위로 자기 존재를 감추고 멋있게 보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현실이 성경이 예언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38절입니다.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팔’은 하나님이 구원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도 그것이 어디에 나타났냐고 반문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하는 이사야 53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자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부터 3절입니다.
사 53:2-3 [2] 그는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메시아가 아름답지 않고, 풍채도 없고, 사람들이 흠모하고 찬양할 만한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살리고, 도와주고, 높여줄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심지어 멸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둠에 빠진 자들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둠에 빠져 있는 자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강력한 힘’을 꼽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좋은 직장에 가고, 높은 지위에 가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도 이런 힘을 기대합니다. 이 힘으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이사야 53장 4절부터 5절입니다.
사 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방식입니다. 죄의 해결을 위해 죄가 없는 분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셔서 죄를 해결하여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심으로만 죄의 해결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힘의 논리’는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을 가지면 더욱 힘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들을 고통하게 합니다. 전쟁, 부의 불평등, 사기, 독점, 난민, 살인 등이 모두 그 결과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것을 열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강력한 힘을 요구하며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행하고 고통하는 이유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갈망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도구로 만들어 파괴하게 만들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을 요한이 재인용하며 39, 40절에 이유를 설명합니다.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사람들이 혹시 믿을까봐 하나님이 이들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신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원래 인간의 상태입니다. 눈이 안 보이고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원래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대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두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은혜는 여러분이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방식은 바울 사도가 영광의 빛을 보았듯 기적적인 방법보다는 완고한 마음을 깨트려 어둠에 사로잡힌 인생들이 하늘의 것을 열망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던 사람이 새로운 것을 봐야 되는데 이 변화가 어떻게 편안하고 익숙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하지 않던 것,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존재의 일부를 포기하며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고통입니다.
운동만 새로 시작해도 몸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평소에 안 하던 줄넘기나 배드민턴을 하면 다음날 팔 다리가 아프듯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지 못합니다. 은혜가 찾아올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며 예수를 빛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운동 근육처럼 믿음의 근육이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이 거부하며 완고하게 반응했지만 ‘이 분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41절에서 이야기합니다.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오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는 영광은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은혜로시며,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참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영광이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영광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이 얼마나 깊은 어둠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42절입니다.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당시에 이스라엘은 종교 사회입니다. 지금 이슬람과 비슷하게, 정치보다 종교가 위에 있습니다. 나라 일을 하는 자들도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들을 출교시키면 이들은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고 사회적으로 매장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여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믿는 자들이 여러 번 나오지만 이 믿음이 진짜인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도 여러 단계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진짜였다면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반응 했어야 하는데 이들은 왜 숨었을까요? 이들에 대해 4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1차적인 차원에 불과합니다. 깊은 수준에서 예수님과 신뢰를 쌓고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듯 했지만 왜 참된 믿음으로 성숙하지 못 했을까요?
이들에게는 하나님 말고 사람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대학, 결혼, 차, 집, 명품, 이런 것들은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사로잡힌 자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너무 중요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 어두움이 빛이라고 착각하고 부끄러워하고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참된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되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오셨습니다. 시골 변두리 출신에, 외모도 볼품없이, 인간적으로는 영광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는, 어둠에 빠진 자들처럼 이 세상 영광을 추구하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되는 것, 빛의 아들로 살아가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결과는 무엇인가요?
2.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vv.44-50
두 번째로 어둠에 사로잡힌 결과는 무엇인가요?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44절과 45절입니다.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봤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이 모든 능력과 하나님의 형성을 그대로 위임받아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인생을 살다 자기 힘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들에 도움을 받을 강력한 존재가 필요해서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신을 감동케 하기 위해서 정성을 보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뿐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통해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도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쳐주신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닌 연약하고 흠모할 만한 곳이 없고 믿을 만하지 못한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헌신을 요구하시지 않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현실적 필요보다 더 중요한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인 죄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진짜 해결해야 되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제 인생에서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이 안 돼서 믿음이 뒤흔들렸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못 하는가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을 지나며, 단순히 건강, 돈, 성공이 아닌 근원의 죄가 깨어져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빚어진 모든 과정이 은혜이며 구원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정말 지루하고 흙먼지나는 광야와 같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영적 본질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자체가 영혼에서부터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여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도 이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때 하나님이 구원이 임하여 빛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됩니다.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면 여전히 어둡고 불안하고 사람들이 시선에 두려워할 텐데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심을 알게 하시고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46절에 말씀하십니다.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예수를 믿어 담대한 빛의 자녀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이 없는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정말로 힘이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처음에 오신 목적이 구원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47절입니다.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능력이 있으니 심판도 할 수 있으십니다. 이 부분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만 우리를 대우하신다면 우리는 당장 심판당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의로운 부분이 없습니다. 불의합니다. 능력과 공의만 내세우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심판하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있지만 구원하러 왔으니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4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지금 내가 나약해 보여도 빛으로 온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믿지 않는다고 당장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시간이며 은혜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반응하지 않고 믿지 않았던 자들을 예수님이 심판하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