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한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 ‘표적의 책’에서는 일곱 가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13장에서 21장 ‘영광의 책’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인 사랑과 공의와 오래 참으심과 은혜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3장 초반부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것이 세상에서는 영광스럽지 않지만 이 장면은 영광의 책에 포함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모든 지위와 권세를 다 내려놓고 낮은 자리에서 제자들 발을 씻기심으로, 하나님만이 보이실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영적으로 정결해졌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vv.1-11
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1a]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입니다.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며 요한복음 13장부터 기록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셨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새벽에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히시고, 가야바의 법정에 서신 뒤,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십자가에서 죽으실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때를 아셨기 때문에 1절 후반절에 어떻게 행하셨나요?
[1b]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누구나 죽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할 것입니다. 내일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 TV나 보고 낮잠이나 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에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실 수 있는 최선, 최고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과 대조적인 모습이 바로 다음인 2절에 나옵니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을 사랑하신 모습,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를 배신하고 제자가 스승을 팔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가 그 생각을 유다에게 넣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귀가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아무에게나 넣었을까요? 아닙니다. 마귀가 베드로에게 그 마음을 넣지는 않습니다. 이미 유다 마음에 저런 예수는 하나님일 리가 없다는 배척과 거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귀가 개입한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 것, 내 눈에 적합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은 내치는 것이 사랑과 반대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싫어한 것 아닙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열심히 쫓아다녔고 열두 명 중 하나로 선택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조차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고자 예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사랑하셨나요? 4절과 5절을 보시면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
물론 요즘에도 세족식을 합니다. 그러나 고대에 샌달을 신고 먼지와 오물이 가득한 길을 다니며 더러워진 발을 씻기는 천한 일과는 의미가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외부의 오염이 영적으로까지 오염시킨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발을 자신이 스스로 만지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노예 가운데도 가장 낮은 지위의 노예가 발을 씻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히브리인 노예에게는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더러운 것들을 밟고 다닌 발을, 같은 히브리인이 씻길 수 없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 발을 씻어주신다는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히브리인 노예조차도 하지 않는 가장 비천하고 더러운 일을 선생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이것은 질문이 아닙니다. ‘이 상황이 말도 안 됩니다’라는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발을 씻는 것이 단순히 발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려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서 베드로가 지금은 이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8절에서 다시 한 번 말리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설명하십니다.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발을 씻기는 행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사랑이며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행위인데, 이 사랑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더 이상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한 발 더 나갑니다. 9절입니다.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영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를 얻으면 더 많이 얻어내려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어주시는 것의 영적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목욕’은 예수님으로 인해 영적으로 정결하게 된 상태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영적으로 정결하게 된 상태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재현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의 보혈로 인해 영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더럽고 불결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7절은 이야기합니다.
요일 1: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더러워진 발을 물로 깨끗이 씻으면 깨끗해집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자가 믿음으로 인해 영혼이 깨끗해짐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영혼의 더러움은 눈으로는 볼 수 없으니 우리는 스스로를 깨끗하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가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살다보면 자기 본질이 튀어나와 자신이 온전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이 폭로될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부정한 가장 현저한 결과가 가룟 유다처럼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왜 부정해지나요? 나쁜 사람을 만나서 혹은 나쁜 행위를 해서 영혼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은 원래부터 더럽고 부정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 오염된 것입니다. 죄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자기중심성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유익을 위해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여러번 말씀하시자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판 돈으로 부유하게 잘 살았나요? 아닙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할 수 없는 자기 중심적 인생입니다. 부정함이 가득해 유혹 받고, 관계를 깨트리고, 불행이 반복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인생을 비참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유혹합니다. 더러워진 몸은 씻으면 되지만, 더러워진 영혼은 어떻게 영적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10절 하반절과 11절입니다.
[10b] …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깨끗한 사람은 예수를 끝까지 믿은 사람입니다. 베드로 또한 예수님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말씀하실 때 화가 났습니다. 베드로도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과 서로 잘났다고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한 정결과 은혜를 베푸시는 유일한 분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정결케 될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 20절입니다.
눅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거룩한 행위도, 봉사도, 성실도 아닌, 예수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평생 의료봉사를 한 의학박사, 신학박사도 예수를 훌륭한 성인이자 인간의 모범으로만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영혼의 죄는 씻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사랑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이 세족식을 통해 ‘너희는 깨끗함을 받았으며 이제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사랑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vv.12-17
예수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기신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 어떤 일을 해내고 나면 누가 따라할 수 있나요? 어느 정도 비슷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누군가 집을 잘 지었거나,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을 옆에서 본 뒤 따라할 수 있나요? 안됩니다. 이미 잘 하고 있고 조금 부족했던 사람이 스승을 보며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령들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외적 행위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진짜 믿지 않는 사람이 열심을 부릴수록 악취가 풍겨납니다. 내 열심, 내 노력, 내 헌신으로 어떤 일을 행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은 사람만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12절, 13절에 발 씻긴 행위의 영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자 노예가 되셨나요? 아닙니다. 여전히 선생이시며 여전히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천하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성의 죄성의 본질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기에 자꾸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고 사랑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가복음 10장 42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예수님께 청탁하고 싸울 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의 행동은 나를 믿지 않는 세상이 하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임의로 주관하는 것, 권세를 부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남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부정한 본질을 하나님은 변화시켜 가십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하면 비참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자발적으로 내 영혼에서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이자,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큰 만족과 기쁨을 누리셨을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안의 죄성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지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를 낮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뜻대로 낮은 곳에 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인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말씀하십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믿는 자는 예수를 따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반드시 예수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거나, 모르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참 사랑을 연습하라고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참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는 것이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16절과 17절에 말씀하십니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세상에서는 낮아지면 낮은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낮아졌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왕이 된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예수처럼 된 자,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낮아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가복음 10장 43절, 44절에도 이야기합니다.
막 10:43-44 [43]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세상의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사랑할 대상을 주셨습니다. 가족, 성도, 친척, 친구, 가깝게 주어진 관계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높은 자라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마가복은 10장 45절은 말씀합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보여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려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죽을 수는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사랑 할 대상으로 주어진 사람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랑할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