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튜브에는 다이어트와 관련한 수많은 영상이 있습니다. 그 중, 몸무게가 131kg였다 500일 만에 50kg를 감량하고 유지하는 한 유튜버는 구독자가 287만 명이라고 합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면 살이 빠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대부분은 의지가 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강한 의지로 성공해 내는 사람들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아마 나도 언젠가 강한 의지를 발휘하면 할 수 있으리라는 대리만족일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결심하고 의지를 발휘한다면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거나 구원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영역에서는 의지, 결심,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 믿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변화되고 죄에서 벗어나 성장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구원은 은혜로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구원은 은혜만으로 이루어지나요?
1. 인간은 두려움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vv.36-38
첫 번째로 인간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니다. 36절 말씀입니다.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대화 중에 반복해서 곧 떠나가실 것과 이곳에 이제 없으실 것을 유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올 수 없고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다’고 하셨더니 37절에 베드로가 또 질문합니다.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의 말이 거짓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바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26장 33절을 보시면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있는 데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도 끼어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지’라고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의 헌신과 사랑은 깊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의 헌신은 구체적이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생각을 다 하고 거기에 대해 각오를 다졌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을 보시면
눅 22:33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각오가 무엇인가요? 미래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리라고 예측이 가능할 때, 그래서 그것에 대해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상황을 보니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도,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옥에라도, 죽음에라도 같이 할 마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런 헌신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다니 얼마나 견고하고 얼마나 멋진가요? 이 정도면 감동하고 칭찬해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것이 바로 인간을 아시는 예수님의 진심어린 반응입니다. 베드로는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보실 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것임이 드러날 불확실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 마태복음 26장 72절부터 7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6:72-74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모른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것이 벌써 두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그러자 73절에서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이나 쫓아다녔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갈릴리 출신이라 예루살렘인과 다른 사투리를 썼습니다. ‘사투리로 티가 나는데 왜 거짓말을 해’라고 조여 오자 베드로가 74절에서 말합니다.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주를 따라 옥에도 가고 죽음에도 가겠다고,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나만은 헌신하겠다고 고백한지 네, 다섯 시간도 지나기 전의 일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반응했나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도 사로잡히고 수치를 당하고 옥에 갇히고 죽을까봐 두려워서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힘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지위가 높아도, 결국 그것을 무너뜨리는 그 무엇이 있음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을 야기하는 또 다른 근원적인 힘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사실 우리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해치는 것들이 너무 두렵다면 여러분은 건강을 아주 원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질까봐 두렵다는 것은 사실 돈이 주는 쾌락이 없으면 인생이 파괴된다고 여길 정도로 돈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해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만드는 본질의 힘은 욕망과 두려움입니다.
욕망과 두려움이 왜 생겼나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며 인간의 영혼이 공허하니까 이 공허를 채우고자 욕심을 부리게 되고,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지킬 수 없자 두려워진 것입니다. 결국 죄에서 시작된 욕망과 두려움을 다스릴 힘은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해도 베드로와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는 순간 일어난 일을 누가복음 22장 61절과 6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눅 22:61-62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배신의 말을 내뱉는 순간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돌아보셨을까요? 가야바의 법정에 붙잡히셔서 증거를 대라며 위협을 당하는 급박한 상황에 말입니다.
죄 짓는 순간을 탓하려고 그러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 가운데 저지르는 한두 번의 죄가 아니라 우리 본질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반역하며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근원적 죄까지도 용서해 주신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인자하시며,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다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중에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 기록했습니다.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
의인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간구에 응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짓는 죄를 찾아내어 벌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허락하셨나요? 인간의 열심으로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열심을 내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아닙니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밖으로 화를 내지 않으면 속으로 화가 나서 우울증에 걸리고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강함과 열심을 자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약함을 인정해 은혜를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만이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나요? 베드로처럼, 실패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온전히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실패의 자리에서 긍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왜 구원은 은혜만으로 이루어지나요?
2. 인간은 영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눅 22:31-32
두 번째로 왜 구원은 은혜로만 이루어지나요? 인간은 영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밀을 까부르듯’ 하는 것은 키에다 곡식을 넣고 공중으로 던지면서 흔드는 행위입니다. 실력 있는 분들이 요령껏 키를 흔들면 가벼운 볍씨는 날아가고 키에는 알곡만 남습니다. 아무리 볍씨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의지를 다해보아도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탄이 그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들을 전부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시험하나요? 믿음을 시험합니다. ‘저렇게 달려 죽는 것이 하나님이야? 저런 인간이 하나님일 리 없어.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팔아버리자’라고 했던 가룟 유다와 사실 제자들도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알고 따라다녔는데 너무 무기력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며 도망갑니다. 낙심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역할이었습니다. 키질을 하면 다 요동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낙심하고, 사람들 말에 무너지고, 하나님을 버리고, 서로 싸우게 되는 배경에 마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마귀나 하나님이 마음대로 움직이며 처분하는 가구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보시면
마 12:28-29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두고 성령과 귀신이 서로 차지하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기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오셔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에게서 그 귀신을 쫓아내버리시면 더 이상 인간이 마귀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나요? 29을 보시면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인간을 가구에 비유합니다. 어떤 강한 사람의 가구를 가지고 오려면, 더 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꽁꽁 묶은 다음에 빼내야 합니다. 지금 성령이 마귀를 꽁꽁 묶어버리고 세간을 뺏어 와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실제 귀신이 들리는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돈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다른 사람을 고통하게 하면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귀적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면 우리 힘만으로는 절대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무슨 일을 하시나요? 누가복음 22장 32절 상반절입니다.
눅 22:32a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
예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며 기도하십니다. 베드로가 의지를 발휘해서 마귀의 키질에서 벗어나 큰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귀의 영향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더니,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리에서 돌아와 다시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헌신이 강했던 예수님의 수제자가 왜 이런 과정을 지나야 했나요? 누가복음 22장 32절을 하반지를 보시면
눅 22:32b …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방해물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는 내가 무엇을 잘하거나 열심히 할 때 생깁니다. 자기 의로 일을 하면 인정과 보상을 원하고 그것이 없으면 화가 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실패의 과정이 없이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의가 강할수록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사랑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관계가 깨집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은혜로 사랑하고 은혜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반응할 때에만 보상을 얻어내려고 하거나 내세우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정말 즐겁고 감사합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세 번의 회복 과정을 진행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 17절입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근심하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떳떳할 수가 없는데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니까 근심합니다. ‘주님 제가 실패할 것 아셨지요. 그러나 지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시지요.’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서 자기 의를 떨치고 예수님의 은혜만이 무엇보다 귀하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때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진짜 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 그 은혜를 흘려보내며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고 내 힘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실패하고 부끄러운 나를 향해 베푸시는 일관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 1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삶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열심을 부리고, 내가 선택하는 삶이었습니다. 띠를 띤다는 것은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제 자아가 꺾이어 남이 그를 묶어 이끄는 대로 이끌림을 받으며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입니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인가요? 영광은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어 죽습니다. 예수님이 똑바로 매달리셨던 십자가에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순종이 그의 죽음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꺾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모습에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로만 구원받는 이유입니다. 베드로가 선택된 이유는 누구보다 헌신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가르치시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은혜를 받으셔서 은혜로 말미암아 더 깊은 사랑을 하는 자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