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근심’은 흔들린다, 요동한다는 뜻으로 다른 말로는 불안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자주 불안해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절 상반절에서
[1a]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떠나실지, 그들에게는 예측하지 못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히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근원적으로는 두려움의 한 부분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거의 유사하게 사용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비가 많이 내렸을 때 저희 집 주차장에도 물이 차기 시작하자 아파트 주민들이 다 모여 걱정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현재적이고 대상이 구체적입니다. 비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은 마음은 불안보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 미래적이고 모호하게 확장된 것이 불안입니다.
두려움은 구체적 대상이 사라지면 대부분 사라집니다. 주차장이 침수될까봐 두려웠지만 비가 멈추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미지의, 미래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불안을 모두 없애기란 어렵습니다. 심리학 용어에도 두려움 장애는 없고 ‘불안장애’가 있는 이유입니다. 불안장애는 내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봐 내적으로 요동하는데 원인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치료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것에 대해 예수님이 1절 하반절에 말씀하십니다.
[1b]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어려서부터 토라를 배우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과 하나님이 언젠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제자 중 몇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자 구원자로 확실히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잠시 떠나겠고, 앞으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더니 제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해 근심과 불안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우리를 위한 영원한 거처가 예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vv.2-3
첫 번째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거처가 예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a]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고난 받고 죽으실 것과 그것으로 벌어질 상황을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며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불안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가장 밑바닥에는 바로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모호성이 영향을 미칩니다.
죽음 자체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것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 안에 가득 있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천국은 정말 있는가? 인간 존재가 사라지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아무도 이야기해줄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고 죽음이라는 치명적 벽에 도달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 종교들은 이에 답을 주기 위해 나름의 해법을 내놓습니다. 모든 종교들의 답을 다 종합을 해보면 ‘삶이 힘들어도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곳에 가고,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서 고통한다’는 권선징악식의 천국과 지옥의 개념과 환생의 개념 정도로 요약됩니다.
종교들은 왜 이런 답을 내놓을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며 삶과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고자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공포로 인해 모든 사람은 불안하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을 보시면
히 2:14-15 [14] …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인간은 영적 죽음 때문에 결국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마귀는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노예로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불안의 결과입니다. 겉으로는 ‘내가’ 미래를 걱정하고, ‘내가’ 자녀를 걱정해서, ‘내가’ 결정해서 어떤 행동을 한 것 같지만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마귀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나를 노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단순히 걱정하는 것으로 간단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 노예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의 영향을 받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통제입니다. 무엇을 통제하나요? 자기가 가장 불안한 영역을 통제합니다. 자녀, 돈, 시간 등, 실제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막연하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심하게 통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인간은 상황도, 사람도, 아무것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불안에 마음이 잠식당하며 영적으로 마귀의 강력한 손아귀에 잡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절 하반절부터 3절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2b]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약하면, ‘내가 잠시 떠나지만 거처를 준비하고 너희를 데려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집을 짓고 계시다고 꾸며냈지만, 여기서의 거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불안과 고통의 이유는 마귀로부터 오는 근원적, 영적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면 마귀가 성도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해서 이 세상의 부조리하고 이기적이고 악한 것들이 서로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세상이 와야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하늘에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늘에 아무리 좋은 집이 있어도, 마귀에 쉽게 유혹을 받고 죄가 가득한 성도가 산다면 그곳은 금방 지옥이 됩니다. 신혼부부가 신혼집만 아름답게 준비하고 인격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파국과 같은 모양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천년 째 인생이라는 과정, 역사라는 과정을 통해 백성들을 모으셔서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천국으로 부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잠시 고난을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5절에서 17절입니다.
계 7:15-17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장막을 친다’는 건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와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유혹받고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인 목마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서 뜨거운 해에 우리가 상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우리는 늘 좌절하고 고통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어린 양이 목자가 돼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은혜의 자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준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준비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부르시면 좋겠지만 어떤 분은 미리 그 나라에 들어가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편이든 우리의 확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두려워할 필요 없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행복과 은혜로 부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인생에서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번 주에 노회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원래 담낭에 돌이 자주 생겨서 돌을 빼내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담낭이 망가졌고, 60대부터 담낭에 염증이 생기고 췌장까지 번지며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는 등 위독한 상황을 자주 지나셨다고 하십니다.
한 달 전, 다시 염증이 시작되고 열이 높아 입원했는데, 거기서 코로나에까지 걸리셔서 담, 췌장 뿐 아니라 폐도 약해져 며칠을 혼수상태로 보내셨습니다. 잠시 의식이 돌아오셨을 때 의사가 연명치료를 하겠냐고 질문하자, ‘망가진 육체로 지금까지 산 것도 은혜이고,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니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아무 조치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 또 의식을 잃을지 모르니 가족들을 불러 기도하시고, 교회 주소록을 보며 성도 이름 하나하나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모님은, 이러다 곧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에 차마 아멘을 못 하셨더니, ‘그냥 갈 수도 있었는데 내 가족들 축복하고, 성도들 축복하고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으니 너무 감사하다’라고 하시며 함께 감사하자고 권고하셨고 그렇게 사모님도 모든 기도마다 아멘을 외치며 이틀 동안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이틀 만에 혼수상태에 빠지셨을 때 주사도 산소호흡기도 끼지 않았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분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믿고 계신가요?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다 부르실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눈물도 고통도 없는 나라에 영원히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약속을 못 믿으면 나의 모든 삶을 통치하고 싶고, 불안함을 떨치고자 몸부림치며 불쌍하고 힘들게 살게 될 것입니다. ‘제 안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셔서 저를 그곳으로 부르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2.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vv.4-7
두 번째로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왜 갑자기 길 얘기를 하실까요?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야기하는 두 번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밥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아야 살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워도 힘들어도 의미가 있다면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같은 군대라도 의무 복무를 하는 일반병과 특전사가 훈련에 임하는 태도는 엄청 다를 것입니다. 내가 선택했는가,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가, 나에게 중요한가 등의 기준으로 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근원적 질문이 무엇인가요?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단순히 아메바에서 진화된 생물이라는 미미한 정의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인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등입니다. 예전에는 기독교가 답을 주었습니다. 중세까지 신학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더 이상 신학의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때 생겨난 학문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근원을 질문합니다. 수 백 년 간, 수 만 명의 철학자가 있었지만 답은 ‘모른다’입니다. 인간은 답을 찾고자 몸부림 쳐도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은 우리로부터는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우리에게 답을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도마가 5절에서 질문합니다.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는지 알려주지 않았는데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릅니다’라고 답을 하자, 예수님이 6절에 말씀 하십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이 답을 찾을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나요?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나요?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 의미가 있나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시고, 하나님이 인생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근원적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이슬람의 ‘두려운’ 신, 불교의 ‘수행을 통해 누구나 되는’ 신, 혹은 미신이나 신화에서 만든 ‘인간보다도 못한 도덕성과 요동하는 감정을 가진’ 신, 그런 존재들을 허망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불안에 떠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가 누구이시고, 어떻게 믿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인지를 기록해 놓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해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 예수님이 마무리 하십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있으면서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와 같은 결말도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서 왜 무력하신가, 왜 약하신가, 왜 더 카리스마가 없으신가, 의심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조금 더 강력 하고 멋있게 인생가운데 개입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예수 믿는 사람이 병에 걸리면 당장 구원해 주시고, 문제가 있으면 당장 해결해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예비 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 내가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만 의존하고 하나님 뜻에만 복종하는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잠시 고난을 겪더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 교만함이 깨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바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우리가 생각하는 미신적인 신이 아니라 예수처럼 낮아지고 예수처럼 희생하게 될 때, 그것이 참된 축복이며 은혜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