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기독교의 가장 큰 신비 중의 하나는 성령 교리입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많은 혼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많고 오히려 이상한 이야기일수록 더 열광하기도 합니다.
왜 유독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많을까요? 첫 번째는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입니다. 성경에 성령님에 대해서 언급된 구절이 3백여 곳입니다. 구약에는 ‘여호와의 신’, 신약에는 ‘거룩한 영’ 등 3백여 차례나 이야기 된 내용은 배제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싶거나 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성경이 가르쳐 주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을 오해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복적인 경향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성령으로 병도 낫고, 성령으로 대학교도 가고, 성령으로 귀인을 만나는 등 문제를 해결받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오해하는 이유는 성령을 감각적 혹은 경험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영’의 본질은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기도하다 성령이 임하면 몸이 떨린다거나, 탁월한 시야로 다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모른 채, 자기 욕망을 위해 성령을 왜곡하며, 감각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성령이 왜 오셨는지를 오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왜 오신 것일까요?
성령은 왜 오신 것일까요?
1.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vv.16-20
첫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 16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6a]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보혜사’는 옆에서 보살펴 주고 은혜를 주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원어 파라클레토스를 번역하면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어는 comforter(위로하는 분), advocate(변호하는 분), counselor(상담해주는 분), helper(돕는 분) 등으로 번역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어떤 도움을 주시나요? 예수님과 똑같은 도움을 주십니다. 그래서 보혜사가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예수님이 원래 보혜사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셨고, 상담해 주셨고, 그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주신 했던 것처럼 성령님도 같은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시면
요일 2:1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없을 때, 우리 대신 대언자 및 보혜사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대신 말씀 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1절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다른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절 하반절에
[16b]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은 영이십니다. 물리적, 시간적인 제약에 관계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지나갈 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도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며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실 수 있다는 절반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무엇이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처음부터 신뢰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그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첫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을 보내셨던 목적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 있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를 해결하는 일이 보혜사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셨듯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령의 역사와 충만함을 간구할 때 성령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어 돈 때문에 어렵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돈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의 근원을 파고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어서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죄악에 영향 받은 마음에서 풀려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죄에서 벗어난 ‘거룩’입니다. 왜 성령을 ‘성령’ 즉 ‘거룩한 영’이라고 부를까요? 그분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이 이야기합니다.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이 우리를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는 죄가 있어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적입니다. 18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령은 독자적으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말로 ‘예수님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은 실체는 다르지만 본질이 같기 때문에 이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도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성령님이시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어 19절 상반절에 말씀하십니다.
[19a]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제자들은 육적으로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이고 육적인 마음은 여전히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도 눈에 보이는 기적과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개입하심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9절 하반절에 말씀하십니다.
[19b] …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지금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뒤에 설명됩니다.
이 생명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을 가진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시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생명을 가진 자들을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영적 눈으로 보며 믿으며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연합이며 영적 신비입니다. 성경은 이 영적 연합과 신비를 20절과 같이 표현합니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세상에선 이런 조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 안에, 다른 존재가 그 안에, 또 다른 존재가 같이 섞여 있습니다. 각자의 인격과 독립성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와 연합할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됨이자 연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데 우리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이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그저 거하실 곳이 없으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고자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나요?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 백성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님과도 연합되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섞여 존재하는 그 사랑의 깊이.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아담은 하와를 보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와는 다른 존재였지만 아담은 그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뼈의 일부이며 살의 일부라고 표현하며 하나의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기에, 사랑이 충만할 때 가장 행복하고, 반대로 관계에서 단절될 때 가장 고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파괴에서 우리를 끌어올려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물처럼 마신다고 합니다. 물은 몸에 들어가면 다 퍼집니다. 피 속으로, 세포 속으로 공급되어 온 몸에 섞여들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한 성령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오신 그 성령이 다른 사람 안에도 들어가 하나인 것 같은 한 존재를 만드십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근원적 생명에 대한 결핍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욕망으로 관계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이 연합을 향한 성령의 통치에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됨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바로 남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의 살아 온 방식, 자기만의 기질, 경험이 만들어낸 틀이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예전에 불렀던 찬양이나 예배 방식만이 옳다거나, 개인적으로도 내가 선택한 방식이 옳은데 배우자는 왜 내 말을 따르지 않는지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판단합니다. 이렇게 정죄하기 시작하면 관계가 파괴됩니다. 용서와 사랑을 배우기 전에 가장 중요한 일은 내 안에 있는 잘못된 틀을 내려놓으며 내가 다른 사람을 품지 못하는 왜곡된 틀이 깨어지도록 간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에야 우리는 성령이 요구하시는 깊은 사랑, 깊은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사랑과 연합은 불가능하더라도 성령을 통해 잠깐이라도 맛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인간 안의 잘못된 판단의 틀이 다 깨어지고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사라진 뒤에 하나님과도 다른 사람과도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연합된 채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 땅에서 연습하셔야 됩니다.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이 만들어내시고자 하는 완전한 연합을 배우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령은 왜 오신 것일까요?
2.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vv.15, 17, 21
두 번째로 성령은 왜 오신 것일까요?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계명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우리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문제였습니다. 구약에서 바로 이 계명을 지켜야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족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없어서 저주가 내렸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이야기합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에는 율법조항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것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십계명도 첫 번째부터 네 번째는 하나님 사랑,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구체적 형태의 율법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자기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시고 우리에게 의를 전가하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어서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온전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17절을 상반을 보시면
[17a] 그는 진리의 영이라 …
성령을 왜 여러 호칭으로 바꿔 부르나요? 진리의 영, 예수의 영, 거룩한 영 등의 수식을 통해 그분이 하시는, 영으로서의 영적 역할을 보여주십니다. ‘진리’는 생명을 얻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우리는 진리보다는 세상의 비진리를 따라가기 쉽습니다.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우리가 산다는 것인데, 세상에서 돈이 최고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유혹받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우리에게 성령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요한복음 16장 13절입니다.
요 16:13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의존해야 할 분이심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합니다. 의무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여러 우상들이 참 생명과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해가며, 예수님 없는 인생은 물 밖에 튀어나온 물고기 같은 것이며, 사막을 물 없이 걸어가는 것과 같음을 고백할 때, 참 진리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를 깨우치셔서 진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 약속이 예레미야 31장 31절부터 33절에 나옵니다.
렘 31:31-33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들은 언약을 깨트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주시며 말씀하시고 우리가 따라갈 수 있게 인도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셨다면 아마 수년째 제 설교를 들으시며 이 자리에 계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그것이 맞는 길임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설교를 들었다 해도 세상에 속해 있을 때에는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 힘은 너무 세기 때문에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반복하여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으며 진리의 성령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맞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성령이 영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17절 하반절처럼
[17b]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함께한 자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면 여러분은 진리로 인도함 받는 것이 무엇인가 아시고 고백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21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법이고 안 지키면 벌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이 우리 안에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이것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성령이 계셔도 아플 수 있고, 성령이 계셔도 우울할 수 있고, 성령이 계셔도 인생의 문제로 슬프고 고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계시면 반드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만들어내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비진리를 떨쳐 내고 진리로 인도함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