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언어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알고 있던 의미로 성경을 오독하여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해서 성경의 단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적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일상에서 ‘사랑’처럼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성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적 사랑은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사랑하나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합니다. 돈, 외모, 취향, 말투, 등 이것들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이것은 자기 정욕을 위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44절은 얘기합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원수는 미워하는 대상입니다. 어떻게 미워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나요? 이렇게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단어가 사용될 때 이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자신이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말씀과 삶이 유리되어 있어도 우리는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랑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시면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This is love:)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영어로는 ‘이것이 사랑이다’입니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세상에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환기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구절 안에 사랑의 속성들이 있습니다. 이 구절과 함께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시면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경적 사랑입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무조건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 심지어 죄인이며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 사랑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대상에 관계없이 일관된 반응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자기희생적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성경의 사랑을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이 목적처럼, 영적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조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것은 성경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원수의 영적 유익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고 사랑한 것이 최고의 성경적 사랑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이 사랑을 요구하실까요? 그런 분은 역사상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우리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나의 무엇인가를 희생해 그가 영적으로 유익을 얻어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하신가요? 왜 나만 희생해야 하나 싶으신가요? 희생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단순한 돈과 시간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원수를 짓밟고 싶고, 무시하고 싶고,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고,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며 그를 받아주고 세워주는 것, 이것이 놀라운 희생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을 예수님이 왜 요구하시나요? 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면 예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이웃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1.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vv.9-12
첫 번째로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9절 말씀입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사랑을 자기만 갖고 계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시면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을 보여주는 사랑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13장에 끝까지 사랑하신 모형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입니다. 발은 단순히 발이 아니라 이것은 십자가의 보혈로 그들의 죄를 씻기시는 것을 비유하는 모형입니다.
자기 생명을 바쳐서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얼마 주고 밥을 사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보이신 뒤 제자들에게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10절입니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말에 순종하고 따라간다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동일시되나요? 성경적 사랑의 개념은 억지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어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무엇을 계명으로 주셨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간단합니다. 이 계명은 엄청난 기적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 할 수 있으나 좋아하지 않는 것, 가치 없는 것, 별 볼 일 없는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그의 영적 이익을 위해 애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왜 해야 하나요? 11절 말씀 때문입니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우리에게 나눠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쁨을 추구합니다. 이것들은 주로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 본질을 채우는 근원적이며 영적인 기쁨입니다.
인간은 온전한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도록 만들어졌는데 본질적 영적 속성을 잃어버리고 공허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탐닉하게 되어 그런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특징은 금방 싫증이 나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적 본질을 이 세상 것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 쇼핑하는 것, 관계 등으로 갈망은 결국 우리를 파괴합니다. 심지어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 열망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중심적 목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가다 보니 관계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와 갈등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기쁨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명령하신 사랑으로 반응하면 깊은 공허가 채워집니다. 이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2.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vv.13-17
두 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아까 읽은 ‘끝까지 사랑하셨다’가 이 곳의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게 될 때 무엇을 약속하셨나요?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사실 예수님과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창조자, 온 세상의 통치자, 죄인을 위해 생명을 주신 구세주와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나요?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듯,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비슷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나랑 친구가 될 유일한 조건은 네가 나처럼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친구의 특권은 15절에 있습니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주인은 종과 일들을 상의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단절된 일방적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영광을 우리와 같이 나누겠다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눈에 보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는 자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나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영적 유익을 추구하여 그들을 세워주는 자가 되겠다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의 이유는 17절에 있습니다.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은 아까 배운 정의에 의하면 상대의 조건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방의 영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왜 몇 장에 걸쳐 반복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나요? 우리 삶에서 이런 사랑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꾸 조건을 달고, 내가 세운 틀에 그 사람이 들어오는지 먼저 스캔을 합니다. 세상의 동호회나 단체는 입단 시험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교회는 사람을 가리면 안 됩니다.
물론 교회 성도라고 모두가 서로에게 꼭 맞을 수는 없습니다. 이 안에서도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어떤 때는 상대가 말한 것을 지적하는 대신 그저 수긍해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던 그 분이 10년 후에, 내가 과거에 그러했는데 용납 받았다고 깨닫고 영적 성장을 이룬 것이 여러분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많은 다양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희생을 요구하실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자기 희생을 하여 상대방의 영적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 유익만 구할 수 없으니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사는 얘기도 물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서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사랑의 성장과 깊이를 하늘사랑교회에서 함께 누리실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