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몇 개월 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저도 궁금해서 이 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찾다 보니 많은 전쟁이 연관되어 뜨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전쟁의 공통점은 결과가 참혹하다는 것과 그 시작점은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악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에 대한 열망이 축적되었을 때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를 파괴합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의 힘에 대한 통찰과 관심이 많았기에 성경의 누구보다도 ‘세상’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세상의 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봄으로 우리도 세상의 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힘 앞에서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1. 예수님이 세상보다 강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vv.1-9
세상의 힘 앞에서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첫 번째로 예수님이 세상보다 강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13장에서 17장에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가 마친 뒤에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기도는 생략하고 그 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했다’고 기록하는데 그치치 않고 그가 데리고 온 사람과 상황까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과 또 그들이 들고 온 등과 횃불과 무기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힘의 대표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와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힘이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은 압박이며 힘이기도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문화이자 유행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전부 따라가는 방식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없애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나요? 자기들의 지위와 영향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들은 힘을 행사할 도구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칼과 뭉치라는 쇠몽둥이를 들고 와서 누군가 자기들을 방해하면 이것들을 사용해서라도 뜻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발전된 분야가 바로 전쟁무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원래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민간으로까지 확산된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남을 파괴하는데 엄청난 힘을 쏟고 무기들을 만들어 내며 그것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이들을 등과 횃불도 들고 있었습니다. 세상도 밤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밤과 어둠을 떨치기에는 그들의 영향력은 등과 횃불처럼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추구하는 힘이 약하거나 적게 가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돈, 배우자, 성공, 명예 등이 아닌 영적 생명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향력 이면의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에베소서 2장 2절입니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사람들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힘을 의존하는 근원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적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근원에는 마귀적 영향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모르셨다가 당황하셨나요? 아닙니다. 4절입니다.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세상이 죽이려는 것을 아시고도 예수님이 피하지 않으셨다는 자체가 이미, 이 세상은 힘으로 예수님을 파괴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상이 당장 행하고자 하는 일보다 더 의미 있고 강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이 5절에서 대답합니다.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나사렛 예수라는 답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답이 아니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줄 때 사용하신 특별한 용어입니다. ‘내가 그니라’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영어로는 I AM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구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장 13, 14절입니다.
출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한글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것이 영어로는 ‘I am who I AM.’입니다. 앞의 I am은 ‘나는’에 해당하는 주어라면 뒤의 ‘I AM’이 이름인 것입니다. 원어적인 의미로는 ‘나는 계속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입니다. 인간처럼 일시적으로 왔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까지 계속 존재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며, 모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창조한 존재라는 의미로 I AM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I AM이 ‘내가 그니라’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름을 답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안에 하나님의 본질과 영광을 그대로 담아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얘기하시자 6절의 일이 일어납니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이 ‘내가 구약의 하나님이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존재자’라고 말씀하시니까 하나님이 본질과 영광이 이 이름을 통해 드러나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대가 바닥에 엎드려졌습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도 아니고 복종을 요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본질이 잠시 드러난 것입니다. 군대의 수가 많다고 한들, 무기를 들고 왔다 한들, 인간은 사라질 먼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강한 자가 누구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잡혀가시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열망하고, 제자들이 열망했던, 로마 군대보다 강력한 권세로 그들을 무찌르고 왕이 되셔서 그들을 통치하며 풍요와 권세를 누리는 것.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은 초개와 같이 불살라진다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초개는 볏단입니다. 우리 눈에 영원할 것 같은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짜 그분의 모습과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 19장 15절과 16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계 19:15-16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몇 명 안 되는 군대에 잡혀가신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위한 일시적인 모습이었을 뿐,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십니다. 그 분을 모르는 자가 하나도 없도록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쓰실 것이기에 그 분을 보는 모든 사람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강력한 힘 앞에 우리는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돈과 권력이 부럽고, 전쟁이 두렵고, 나를 방해하는 존재를 파괴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켜주시는 유일한 분은 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8,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8b] …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잡혀가시면서까지 제자들을 위하셨습니다. 그들이 잡혀가서 고통당하는 자리에서 면제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세상의 힘 앞에 두려워하거나 힘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인생에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약한 존재라 붙들 대상이 필요한데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면 세상에 속아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에서 다윗이 죽음의 위험과 고통을 지나가며 무슨 고백을 하게 되었나요? 시편 27편 1절을 보시면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고 약속하셨고, 예수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라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지 못하면 세상의 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두렵게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우리 피난처치며 구원이시어 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세상의 힘 앞에서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2. 힘으로 맞서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vv.10-11
두 번째로 세상의 힘 앞에서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힘으로 맞서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 후 베드로가 또 등장합니다. 10절입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한테 칼이 있어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흥분한 상태에서 귀를 목표물로 삼아 베어내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머리를 치려다 말고가 움직이며 귀가 베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군대에 맞서한 이러한 대응은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만약 말고의 머리나 목을 쳤다면 제자들이 다 죽임을 당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혈기만큼은 칭찬해야 마땅한가요?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11절입니다.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에서 벌어지는 힘의 싸움에 정식으로 대응해서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이야기가 마태복음 26장 52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칼은 세상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가고, 성공하고 싶은 많은 욕구 가운데에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 드러내고 싶은 존재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지면 내 마음대로 해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추구합니다. 힘이 있어야 무시받지 않고, 나를 무시하는 존재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살던 사람이 있습니다. 요압니다. 사무엘하 3장 27절을 보시면
삼하 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요압의 동생 아사헬과 아브넬은 알던 사이입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여러번 당부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쫓아오자 아브넬이 창끝으로 살짝 밀어내려고 했는데, 아사헬이 너무 빨라서 그만 아브넬의 창끝이 아사헬의 배를 뚫고 들어가서 죽어버렸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너를 죽이면 요압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냐고 말렸는데도 아사헬의 고집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복수심을 품고 있다 거짓말로 군대 장관인 아브넬을 불러 내어 죽여버립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20장 10절입니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
아마사에게는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요압을 대신하여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질투심에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이 힘을 갖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 복수와 질투의 두 가지가 아주 강력한 요소입니다.
성경은 왜 이 이야기들을 기록했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과 정반대되는 저주와 멸망의 세상의 방식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수와 질투의 칼을 휘두른 요압이 어떻게 죽는지 열왕기상 2장 32절, 3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상 2:32-33 [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다윗이 행하지 못했던 요압에 대한 피의 심판을 솔로몬이 왕이 되어 대신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복수하고, 군대 장관 자리를 빼앗기자 질투해서 죽여 버리는 세상의 힘의 방식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허용되지 아니함을 보여주고자, 요압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다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듯 힘을 추구하며 그 힘으로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듯 세상의 힘을 가지면 복수와 질투의 욕망에서 벗어나 평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어떠신 분이신지 믿음으로 세상의 힘의 유혹에서 벗어난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