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성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신실하게 신앙을 지키려 해도, 세상의 힘 앞에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세상의 힘이 너무 강력해 보이면서 믿음은 더 타격을 받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만 하셨는데 이제 실제 예수님이 잡혀가셔서 대제사장들 앞에서 곤욕을 당하시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12절부터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군대, 천부장, 대제사장, 전 해의 대제사장 등 세상의 힘과 종교적 힘이 결합해 예수님을 위협하자 베드로에게 심각한 믿음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예수님은 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는 내가 조금만 부자라면, 내가 힘이 많았다면 등을 가정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힘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세상의 힘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1. 성도의 정체성을 부인합니다. vv.15-18
첫번째로 성도의 정체성을 부인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요한으로 추측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지만 충성된 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마침 요한은 대제사장과 이전에 알던 사이라 그 집에 먼저 들어갔고 베드로를 들어오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16절, 17절입니다.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을 때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크게 호산나를 외쳤을 것이고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인가를 물어보자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고대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의 뜻과 행동과 말을 따르겠다고 인생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원한다고 다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쫓아다닌 많은 사람들 중 특별히 열두 명을 택하셨고 사도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제자의 근원은 스승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 당신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했는데 그 스승이 사라져버리면 제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정체성의 근원은 예수님께 두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없어지시고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베드로는 베드로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무엇인가요?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자기 존재의 인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정체성의 근거를 눈에 보이는 상황과 힘에 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설명할 때 세상이 힘이라고 여기는 것에 의거해 보지만, 상황은 늘 변하기 나름입니다. 얼굴이 예쁜 것, 좋은 학교를 나온 것, 땅 값 비싼 동네에 사는 것, 이런 것들의 기준은 변합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합니다.
비교의식은 엄청난 우월감과 열등감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 나를 재어도 나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월감을 가지면 상대를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반면에 열등감을 가지면 주눅이 들고 굽신거립니다. 정체성의 기반을 세상에 두는 순간 인생은 고통스럽습니다. 불안합니다.
성도의 존재의 근거는 예수님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하고, 변함이 없고, 가장 강하신 분이십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찬양할 때는 진심이지 않습니까? 그 찬양을 부르는 순간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살며 예수님이 돈보다 힘이 없는 것 같은 순간에는 흔들리게 됩니다. 베드로도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했으나 당장 눈 앞에 예수님이 사로잡히고 힘이 없어 보이자 정체성이 흔들리며 모든 것을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의존할 영원한 대상이 예수님뿐이라면 왜 예수님은 자신을 강력하게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세상의 왕이 되신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더 잘 믿을 것 같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참 성도가 아닌 가짜들이 너무 많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를 무서운 죄에서 구원하신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자들, 병 고쳐주고, 돈 주는 예수만 원하는 자들, 사실 예수가 아니라 어떤 신이어도 상관없는 자들만 교회에 가득할 것입니다. 아마 교회 출석해서 통장에 돈이 늘어난다면 성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겠지만 예수님은 수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이익이 없더라도 그분을 생명의 구주로 믿고 의존할 사람들을 만들어 내시고자 하십니다. 온전한 관계라는 것은 이익 관계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찮은 이유 때문이라면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은 약하게 보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강력하고 화려했던 세상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날, 참 백성들이 예수 이름을 높이 외치게 될 날까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세상의 힘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2.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vv.19-27
두 번째로 세상의 힘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19절과 21절을 보겠습니다.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3년 동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들도 여러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문을 하니 예수님은 자신이 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 다음 22절입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대제사장은 강력한 분이니 물어보면 답을 하라고 하인이 예수님을 쳤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응대하지 않고 맞으셨습니다. 게다 말을 안 하니까 24절에서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별 것도 아닌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해?’하며 다른 사람과 얘기하도록 결박한 채로 보내지다니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목격한 것입니다. 충성하는 마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갔는데 예수님이 힘을 발휘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예수님이 안 보이면 우리는 흔들립니다.
제 인생에도 아버지 사업이 망했을 때, 사당동 건물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을 때, 하나님이 돈을 주시길 기대하다가 실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때는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하나님 되길 원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의존하지 않고 예수 믿지 않고 내가 해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힘을 의존해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교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힘을 안 주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출 수 있는 자가 되도록 성장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예수가 없으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만드셔서 예수를 더 사랑하고 의존하는 자게 하시는 은혜가 가장 영원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약해 보일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26절, 27절입니다.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수님을 잡으러 갔다 귀가 잘린 말고의 친척이 현장에 있었나 봅니다. 칼로 유일하게 저항을 하며 난동을 부린 자를 기억한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도 부인합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부인했나요? 마태복음 26장 72절을 보시면
마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였습니다. 세상의 힘이 두렵고, 예수님은 너무 약해 보이니까 자기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예수를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무서워서 튀어나온 마음이고 그의 본심은 마태복음 26장 35절에 있습니다.
마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불과 몇 시간 전에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늘 이렇게 흔들립니다. 믿음이 약해져서 세상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을 못 받는 건 아닌데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누가복음 22장 61절과 62절에
눅 22:61-62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부인하면 스스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실수할 수 있지만 그러고 나면 죄책감이 찾아오고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정죄하려고 보신 것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안쓰러워서 쳐다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늘 두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 오면 설득이 되고, 세상에 가면 세상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의존하고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갈등과 죄책감이 오고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이미 사랑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면 불편하고, 잘못했으니까 보상해야 될 것 같아 합니다. 이런 인간적 마음이 가득하니 베드로는 21장 3절에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그를 부르셨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소망이 없어지니까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일한 결과는 빈 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세상 사람은 텅 빈 영혼을 채우고자 술과 돈과 마약을 넣고 마치 행복하고 채워 진 척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인생이 빈 그물처럼 공허하고 불만족합니다. 저도 예수를 열심히 믿던 부모님의 회사가 망하고 하나님께 너무 실망해서 하나님과 거리를 두려고 했습니다. 교회 출석은 했지만 설교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너무 고통했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붙들 것도, 간구할 것도 없이 영혼이 망가지기 시작하자 몸도 마비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해서 혹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로워지나요? 아닙니다.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자녀를 하나님이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엄마가 젖먹이를 잊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눈동자처럼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거리를 둬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21장 17절 말씀입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심각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 번이나 물어보신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었으니까 지금, 예수님 제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세 번 입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신 거예요. ‘네가 부인해도 괜찮아. 난 이미 알고 있었어. 괜찮아’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밤새 고기를 잡아도 텅 비어 있던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인생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명이 주어지면 살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며, 우리를 기도를 통해 낙심한 자가 회복되고, 우리를 통해 믿음 없던 자가 믿음을 갖게 될 때 그것이 가장 큰 기쁨과 영광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세상과 비교할 때 너무나 연약한 분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 분은 영원한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여러분 영혼이 회복되셔서 세상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