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원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주변의 모두가 옳다고 하는 가치가 있다면 금방 영향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 그들과 같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공감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막상 세상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듣다보면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 의구심이 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들의 반응에 놀라거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왕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1. 극도의 적대감을 보입니다. vv.28-32, 38b-40
그렇다면 하늘의 왕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극도의 적대감을 보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심문하다 별 소득이 없자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관정까지 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는 구절에 모순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대화를 하면 오염이 되어 유월절 잔치에 정결하게 참여할 수 없다고 판단해, 관정까지 와놓고도 빌라도는 직접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던 이들은 실상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이익으로 인해 헌신하고 충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유도 예수님으로 인해 손해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시스템을 통해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시면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
남을 죽이려는 자리에서까지도 정결을 위해 이방인을 만나지 않겠다고 열심히 율법을 지킨 중요한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물질적 보상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성전에서 봉사하던 사두개인들도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부에서 가지고 오는 양이나 염소 같은 희생 제물 대신 자신들이 기르는 짐승만 사용하게 하고 또한 많은 수수료를 거두면서 당시에 가장 부유한 계층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다른 부분은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나와 있습니다.
요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종교적인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종교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종교적으로 열심 있게 보이면 어떤 유익이 있나요?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종교적으로 탁월한 행위를 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환전상들과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면서 자기들에게 경제적 손해가 왔고, 예수님이 대중의 인기를 얻으시자 자기들의 인기가 떨어질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극도로 반대하는 무리들은 결국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유익과 편의가 사라질 것이 두려워서 적대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이들에게 빌라도가 질문합니다. 29절입니다.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들을 의아하게 여기며 질문했더니 이들이 답합니다. 31절입니다.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으신 것을 악하다 할 수 있나요?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세상의 ‘선’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악’은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선과 악의 기준은 다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려서, 남에게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이 나에게 손해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악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기후 위기로 인해 2050년만 되어도 지구상에 인간이 제대로 살 수 없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들이 기후 협상을 하며 탄소를 줄여 지구온난화를 늦추자고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며 좋은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나라들도 상당합니다. 바로 개발도상국들은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제재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선진국들은 탄소를 마음껏 배출해놓고 왜 우리는 조심해야 하냐며 탄소 줄이는 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하고,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도,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않고 내가 누리는 영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를 처벌해 달라고 했으나 빌라도는 예수님과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이렇게 판단합니다. 38절 하반절입니다.
[38b] …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가 볼 때도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과 질투임이 명백했기에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악자가 아닌데 왜 고난을 받으셨나요? 이마저도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시면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죄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진 의를 우리가 덧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원래 의인인 그분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에 대해 빌라도가 31절에 이야기합니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큰 죄인은 아니니 너희 법대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자 유대인들은 ‘죽일 권한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살해 욕구를 표츌합니다. 어떤 대상을 없애버리고 싶은 극단적 적대감이 최고 종교 지도자라는 대제사장의 입에서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49절부터 50절을 보시면
요 11:49-50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한 명만 죽이면 온 민족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조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이고자 집단적으로 반응한 것 또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것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31절입니다.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어야 하는데 만약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 죄를 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간들은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나요? 자기 이익에 반하는 상황들이 벌어질 때 인간의 무서운 모습이 표출됩니다. 39절과 40절입니다.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사도신경의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때문에 빌라도는 나쁜 인간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너네 법대로 하라, 내가 볼 때는 죄가 없다, 한 사람을 놓아 줄 텐데 예수를 놓아줄 것을 제안을 하지만 군중들은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기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버리고 없애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순간에 이제까지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던 것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 5절에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입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인간은 어쩌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교회 다니다 상처받고 떠났다는 사람들 중 물론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신학을 이유로 대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복주의의 위험성입니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분으로 여겨 그 분에게 열심을 부리는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습니다. 주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먹지 못할 정도로 고기를 많이 주시지만 그들은 고기를 다 씹기도 전에 심판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그 자리는 기브롯 핫다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렸습니다.
갈구하고 원하면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진짜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구원의 자리에 동참하지만, 원하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상처받고 하나님을 향해 극도의 적대감을 보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기복주의가 너무나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된 복음과 기복주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복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면 인생에서 원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질 때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져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지 않고 진짜 좋은 것을 주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도록 만드십니다.
지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 하나님에게 실망하여 아직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았어라고 불평하지는 않으시나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아들의 피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공평하고 온전하게 사랑하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부자로, 어떤 사람은 능력 많은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한 세상의 능력을 받으셨다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것을 잘 사용하신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린다면 어쩌면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시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늘의 왕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2. 전혀 무관심합니다. vv.33-38a
두 번째로 하늘의 왕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전혀 무관심합니다. 33절입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바로 며칠 전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호산나로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모를 수가 있나요? 그런데 아무런 정보도 없는 양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어봅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가 이 지역을 관장하도록 허락한 집정관이었습니다. 유대에도 왕이 있었지만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니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진짜 권력은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왕권은 강력한 로마의 권력으로 유지됩니다. 그렇기에 호산나 호산나 외쳐도 빌라도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내 배경이고, 군대가 내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을 근거로 삼고 예수님 및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빌라도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34절, 35절입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본인 생각인지, 들은 정보인지 질문을 받았는데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인지 아닌지, 뭘 했길래 넘겨졌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몇 년째 그 지역에서 돌았지만 자신의 권력과 쾌락에 취해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36절에서 예수님의 나라가 어디에 속한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의 왕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이 땅 나라를 압도하고 하늘나라의 원리에 이 세상은 종속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그저 흘러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역사와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임 당하는 것 또한 허용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하신 제일 중요한 일이 진리를 드러냄으로 마귀에 매여 살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백성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가요? 이방인 권력자인 빌라도는 원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열광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고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신이 구원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필요가 없었다가 지금 하늘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에 대해 얘기를 하시자 당황합니다. 38절 상반절입니다.
[38a]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
일단 묻기는 했지만 답도 듣기 전에 가버립니다. 빌라도의 이 모습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영적 태도입니다. 돈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능력을 받지 않은 것이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능력이 많아져도 겸손하고 온유하게 중심을 잡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남들이 부러워는 힘을 갖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존하는 인생이 어쩌면 더 큰 복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무관심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자체가 우리 인생의 큰 복일 것입니다. 이 복을 받으신 여러분 모두 은혜에 감사하는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