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신약성경의 여자 이름에는 마리아가 많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의 대부분 여자는 마리아입니다. 조상의 이름을 따서 짓는 풍습에 따라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에서 나온 이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본문에는 마리아가 더욱 집중되어 등장합니다. 25절입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의 여인 중 세 명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아닌 이모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일부러 마리아 아닌 이름을 빼어, 예수님 주변에는 마리아들만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자리에 함께 있는 자들은 마리아와 같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 선 마리아들이 누구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선 마리아들은 누구인가요?
1. 가장 무력한 자들입니다. vv.23-27
첫 번째로 십자가 앞에 선 마리아들은 가장 무력한 자들 입니다. 2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3a]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
마리아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군인들이 한 일을 설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겉옷은 큰 천을 몸에 두르는 튜닉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사형 집행을 하는 군인은 보통 4명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리 군인이라도 남의 목숨을 빼앗고 못 박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사형수의 물건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겉옷뿐 아니라 속옷도 나눠가집니다. 23절 하반절 입니다.
[23b] …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a]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
겉옷은 여러 천을 덧대어 만든 것이지만, 속옷은 부드러운 천이라 한 사람에게 몰아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목숨을 잃어가는데 그의 마지막 옷가지를 취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무정해 보이지만 이는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24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24b] …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구약의 다윗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십니다.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자기를 고통하게 하는 원수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집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옷가지를 취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군인들의 이야기를 이곳에 넣은 이유도 다음에 나오는 마리아들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25절의 마리아들은 자기 이익을 구한 군인들과 어떻게 대조되나요?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이들은 여자이며, 가장 무력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자리에서 무력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며, 무너지는 그 가슴을 치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왜 이런 무력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나요?
그들은 무력했지만, 예수가 구원자이며, 예수가 사랑을 주셨으며, 예수가 유일한 의존의 대상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력감을 컸을 여인이 누구인가요? 바로 천사의 고지로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을 보시면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이것은 환각이나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몸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예수를 낳은 기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마리아는 평생 아들이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날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나에 돌아오셨을 때 큰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2장 3절부터 5절입니다.
요 2:3-5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대가 없었다면 하인들에게 명할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는 30년 동안 고민하고 의문을 품고 믿었던 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을 메시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하십니다.
육신적 어머니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마리아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찬양했던 사람들을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여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임을 알고 철저한 무력함 가운데 울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혼자 이 상황을 지나가야 했다면 아마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저한 무력감으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26절과 27절입니다.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무력감 가운데 흔들리는 마리아를 요한에게 의탁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 무력감입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군인들처럼 예수님 옆에 서 있지는 않나요? 힘을 의존하고 사랑하며, 죽어가는 예수의 옷자락을 빼앗는 자는 아닌가요?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죄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위대한 우상을 예수에게 접목시켜 예수를 우상처럼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력해져서 예수를 의존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가 강력하기에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믿고 알라를 믿는 이유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와 다른 지점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는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가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나를 구원하심을 믿기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마리아들은 예수 곁에 서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가장 무력한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실 때,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그늘과 은혜 아래 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선 마리아들은 누구인가요?
2. 가장 고통 받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앞에 선 마리아들은 누구인가요? 가장 고통받는 자들입니다. 25절입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막달라’는 동네 이름입니다. 이름이 흔하니까 지역 이름을 붙여서 ‘어느 동네의 누구’라는 형태로 구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눅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고통하던 원인이 악귀와 병, 두 가지라고 합니다. 요즘은 정신적으로 고통하는 사람을 악귀에 들렸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모두 귀신의 영향력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정신적 어려움이 마귀적 영향력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라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일곱 귀신 혹은 군대 귀신 등의 표현은 한 사람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로잡혔는지를 보여주는 영향력의 개념입니다. 이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아마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귀신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왜 복음서에서 갑자기 귀신들이 많이 등장할까요? 마귀적 영향력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과 싸울 수도 대항할 수도 없이 그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적 영향력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미친 것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중독으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상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두렵고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모습으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답이 없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로 인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고통’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 이름 ‘미리암’의 어근이 ‘마라’입니다. 구약성경에 마라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15장 23절을 보시면
출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물을 만났지만 너무 써서 마시지 못했던 그 물 이름이 ‘마라’였습니다. 또한 성경의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요청합니다. 룻기 1장 20절입니다.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기쁨’이란 뜻의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과 재산이 있었습니다. 가뭄이 오자 모압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들이 죽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나오미가 왔다’라고 하자, 내 인생은 기쁨이 아니고 고통이니 마라라 부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다 ‘마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없으면 마귀적 영향력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왜 십자가까지 나온 것일까요?
예수가 없으면 자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자기 이익의 대상으로 따랐던 자들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도 자기를 고통에서 구원한 유일한 분이시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를 진짜 만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무력감과 고통입니다.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력하고, 힘이 없고, 세상이 두려울 때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는 예수를 만나고 나면 우리는 예수 옆에서 울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베풀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아도 예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곁을 지킨 마리아처럼, 무력감과 고통 가운데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