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최근 영화 중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영웅’을 보셨나요? 나라를 위해 가족과 지위와 미래와 생명을 포기한 그는 멋있게 그려졌지만, 그 주인공이 나라면, 과연 우리 중에 몇이나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그와 같이 위험을 무릅쓴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지금 상황은 예수님이 황제의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직후입니다. 얼마나 서슬이 퍼런지, 생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이 때 두 사람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데 이것은 예수와 같은 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에서 딱 70명이 참여하는 최고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원들로, 이들이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 있었습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북한의 간첩이었음이 드러났을 때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담대히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어떻게 세상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나요?
어떻게 세상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나요?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v.38
첫 번째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38절 상반절입니다.
[38a]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
당시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설명할 때 출신 지역을 붙였습니다. 아리마대 출신인 요셉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기로 결의한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기에,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발각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셉은 아주 큰 부자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입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
‘아리마대 지역의 부자’가 수식어라면 아마 그 지역의 제일 가는 유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부자가 아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주어진 부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유익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가복음 15장 43절입니다.
막 15:43 …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
요셉은 단순히 정치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존경 받았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가 인기를 얻자 자기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까봐 정치적 야망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일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이고, 영향력 있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사회에서 종교와 관련된 직업은 존중받았지만 물고기를 잡는 일은 부정한 것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에 하층민으로 여겨졌으며 세리는 공식적인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자들도 다 도망쳤습니다. 돈, 명예, 지위 때문이 아닌 그저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잃을 것이 훨씬 많았던 아리마대 요셉은 38절 하반절에 이렇게 행동합니다.
[38b] …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무도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직접 시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은 장면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입니다.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
‘당돌히’는 이유없이 끼워 넣은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어떤 일을, 감히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당돌히’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일까요? 반역자라는 누명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23장 53절입니다.
눅 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당시 중동의 장례 문화는 돌로 만든 무덤에 시체를 놓고 1, 2년 정도 방치한 후 살이 다 썩고 뼈만 남으면 뼈를 가져다 가족의 납골당에 함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무덤들은 수십 년, 수백 년간 사용되었을 것인데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이니 자기 무덤을 새롭게 준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새 무덤에 안치한 아리마대 요셉을 마가복음 15장 43절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막 15:43 이 사람은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누가복음 23장 51절에도 똑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눅 23:51 그는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는 아무도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일까요? 천국에 대한 소망은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 가운데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통치가 필요한가요?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깨어져 있으며 모순된 것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완전과 허무를 덮기 위해 더 화려한 것으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는 영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돈의 힘을 벗어났기에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돕고, 자기를 위해 준비한 무덤까지도 예수를 위해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양재동에서 논밭을 수십 년 째 지니고 있다가 수천억을 땅을 소유하신 어르신께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돈이 그렇게 많으셨지만 주차장 컨테이너 박스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내셨다고 합니다. 저도 돈이 많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상상해 보는 적이 있습니다. 보육원에 있다가 나이가 차서 단돈 오백만원을 들고 사회로 내쫓기는 아이들, 탈북했지만 이 땅에서 제대로 케어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 등, 돈이 있다면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질은 움켜쥐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 세상의 불완전성을 보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열망했습니다. 자기는 부자고 인정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상황은, 안중근 의사가 살던 시대와 같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누려도 나라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안중근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세상의 불완전을 없애기 위해 불완전의 요인이 되는 한 사람만 제거하면 되나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한국이 해방되고, 한일합방을 막았나요? 아닙니다. 히로부미가 1909년 사살되고 바로 다음 해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을 죽였다고 역사가 달라지거나, 자유와 천국이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직적으로 훈련하고 무기를 준비해 로마 사람 및 로마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해방하려고 한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뒤집어엎는다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치를 해 보았는데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통치를 기대하시나요? 예수를 안 믿으면 무엇인가는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 힘, 사람은 진정한 자유와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때에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됩니다.
어떻게 세상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나요?
2.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vv.39-40
두 번째로 어떻게 세상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나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39절과 40절을 보겠습니다.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니고데모는 모든 면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유사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큰 부자이자,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 그가 부자라는 것은 ‘몰약과 침향 백 리트라’로 알 수 있습니다. 몰약은 작은 병에 담긴 것이 현재의 돈으로 수천 만 원입니다.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옥합이 삼백 데나리온으로 1년치 연봉에 해당하니, 백 리트라는 30kg가 넘는 분량으로 지금 시세로는 수 십 억에 해당합니다.
성경은 니고데모를 ‘예수께 밤에 찾아 왔던’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은 ‘낮과 밤’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반복합니다. 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 세상의 어둠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찾아왔을 때는 니고데모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지금 그가 가지고 온 향품의 양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왕이며 그리스도로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0kg가 넘는 향품은 왕을 장사지낼 때 사용할 만한 분량입니다. 장례를 수십억을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십억짜리 명품 수의를 입느니 살아계실 때 입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주 유명하고 높으신 분이 돌아가시면 수십억을 쓰기도 합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단순히 돈이 많아서 돈을 물 쓰듯 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수십 억짜리 향품을 받으실 만한 위대하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과의 대화에 그 힌트가 들어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과 2절에서 니고데모가 질문합니다.
요 3:1-2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당신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이 유명한 답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답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듭남에 대한 앞부분만 알고 대화의 결론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화의 결론은 3장 14절과 15절에 있습니다.
요 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자가 모세가 든 뱀처럼 들린다는 의미를, 구약의 율법학자인 니고데모는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원망하며 반항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불뱀은 뱀의 한 종류가 아니라, 이 뱀에 물리면 몸이 불타듯이 뜨거워져서 죽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아마 코브라나 방울뱀과 같은 맹독을 가진 독사의 일종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신 이유는 ‘너희가 뱀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신데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은 뱀처럼 하나님을 깨물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서로를 깨뭅니다. 독에 면역이 없는 사람의 몸에 독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 독은 상처가 됩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옛 뱀, 마귀의 자식이기에 우리 안에는 독이 흐릅니다. 우리는 몸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물어뜯게 되었습니다.
40년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죽이려고 인도했는가’ 원망하자 하나님이 ‘너희가 이런 존재’라며 뱀을 보내셔서 온몸을 불타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다 죽이셨으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났을 텐데. 하나님은 ‘놋뱀’이라는 구원의 수단을 주셨습니다.
왜 하필 뱀이었나요? 깨물고 싸우고 불평하는 영혼의 본질인 죄악이 가득한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매달려 죽었어야 할 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달려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가 평생 죄로 말미암아 남을 깨물고 독을 퍼트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깨물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환경을 주시냐고, 왜 저 인간을 심판하지 않냐고, 구원자가 왜 이따위냐고, 하나님을 향해 독을 뿜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지 않고 독을 다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매달려야 하는 자리에 예수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린 인자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니고데모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요한일서 5장 5절은 이야기합니다.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독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언젠가 꼭 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참지 못하고 그때그때 쏟아내는 사람도 위험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뱀인지를 십자가 앞에서 인정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붙드는 자만이 죄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나보다 더 강한 자, 더 높은 자는 항상 있습니다. 뱀처럼 독을 뿜어내던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이 나를 깨물어도 받아낼 수 있는,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예수로 인해 독을 해결하여, 예수와 같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