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던 한 분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성경의 모든 기적을 다 믿지만 딱 한 가지, 예수님의 부활만은 믿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기적도 부활도 믿지 않는 분은 많지만 다른 기적은 다 믿으면서 예수님의 부활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그 한 분 뿐일까요?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믿음은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서서히 성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 또한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여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믿음의 차원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1.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vv.1-2
첫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요즘으로 치면 금요일 오후 3시 정도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 전까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1천 걸음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저녁이 되기 전에 급하게 장례를 치렀던 것 같습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장사를 급하게 치르느라 미처 향품을 준비하지 못해서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자기들이 준비한 향을 예수님에게 바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오기 직전인 마태복음 28장 2절부터 4절을 보시면
마 28:2-4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들이 내려오고, 돌문이 열리고,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이 벌벌 떨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고 바로 뒤에 여자들이 이곳에 찾아온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 때 여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절부터 6절입니다.
눅 24:4-6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요한복음에는 다른 여자들은 나오지 않고 오직 막달라 마리아만 등장하는데 막달라 마리아만 천사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위의 누가복음 본문처럼, 천사를 만난 여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들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천사에게 들었다고 증언을 하는데,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와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것 같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같이 간 여자들은 최소 다섯 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0절을 보시면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왜 복음서의 기록이 상충할까요? 정황을 미루어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보고 혼자 먼저 제자들에게 달려갔고 다른 여자들은 남아서 상황을 둘러보다가 천사를 만난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뒷부분에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무덤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혼자 제자들에게 상황을 알리느라 천사와 예수님을 만나는 상황이 뒤로 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만 단독행동을 했나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시체가 사라졌을 두려움이 제일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려움은 사실 사랑에 근거합니다. 금방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잃어버려도 상관이 없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쏟은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렀던 자입니다. 일곱은 숫자가 아니라, 귀신의 강력하고 완전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인생에서 기쁨, 만족, 즐거움, 평안을 모두 빼앗긴 채,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저주와 고통과 슬픔이었던 여인이, 예수를 만나 구원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를 만난 은혜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은혜와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예전에 인생을 망가진 채 살다 나이가 들어 예수님을 만난 분의 간증에 따르면 세상의 색깔마저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회색빛이었다면 예수를 만나고는 세상이 푸르고, 나뭇잎도 자신을 향해서 손을 흔드는 것 같고, 세상에 처음으로 눈을 뜨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이 죽음 이후에 부활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두려움의 근원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죽음에 빼앗겼을 때 닥친 슬픔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허둥지둥 행동한 것입니다. 다른 여자들은 무덤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천사도 만나고 예수님 또한 일찍 만났습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에서 9절입니다.
마 28:8-9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달리려다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중요한 증거입니다. 고대에 여자들은 증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조작하려고 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이 여자들이라는 것을 감추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보다도 먼저 여자들을 만났고, 이들이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로만 부활을 이해한다면, 매년 한 번 부활절 행사만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인생에서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으로 관계가 단절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와 연합한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많은 두려움을 가져오는 근원적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2. 감각에 매인 미련한 삶을 살게 됩니다. vv.3-10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감각에 매인 미련한 삶을 살게 됩니다. 3절과 4절의 상반절 말씀입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a]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다른 여자들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24장 9절입니다.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처음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오다가, 중간에 여자들을 만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둘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들이 천사들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계신 것을 직접 봤다고 이야기 했는데, 사도들의 반응이 누가복음 24장 11절에 있습니다.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허탄한’ 말을 영어로는 silly talk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도 ‘바보 같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은 뒤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이 거룩한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들은 허탄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에 의존된 인간의 상태입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직접 보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틀은 너무나 좁기 때문에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아픈 사람이 나았다는 것은 믿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성의 일반적 수준에서는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는 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 눈으로 보거나 확인할 수 없는 믿음과 영적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것을 직접 확인하려 합니다. 4절 하반절부터 5절입니다.
[4b] …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은 무덤까지 앞서 달려갔지만, 시체가 사라졌다, 천사를 만났다, 예수님을 만났다, 이런 혼란 가운데 머뭇거리고 있는데 6절 상반절에 베드로가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6a]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
들어갔더니 어떤 일이 있었나요? 6절 하반절입니다.
[6b] … 세마포가 놓였고
세마포가 놓여있다는 것은 얼핏 사소한 디테일 같지만 이것은 중요한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마포는 죽은 사람을 돌돌 말아 고정하는 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흘러나오고 또 몸이 다 틀어집니다. 그래서 팔다리가 틀어지지 못 하도록 싸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셨으니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흘렀을 것입니다. 머리엔 가시관을 쓰셨고 옆구리에 창에 찔려서 피와 물이 잔뜩 흘러 나왔습니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피가 흘렀습니다. 또한 니모데모가 가지고 온 향품을 세마포와 함께 싸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상처에 거즈를 둘렀다 떼 본 경험이 있으시지요? 피가 묻은 거즈는 떼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온 몸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고 물 형태의 향품까지 세마포와 엉겼습니다. 이런 상태의 시체를 훔쳐가려면 세마포를 벗기지 않고 통째로 훔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마포는 사람 몸이 연기처럼 빠져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모양으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또 7절에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수건을 시체 위에 살짝 덮은 것이 아니라 머리를 돌돌 말아서 완전히 감싼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예수님이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몸과 얼굴을 꽁꽁 묶어 놓은 것입니다.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면 정성들여 세마포를 몸과 얼굴에서 벗겨낸 다음 다시 돌돌 말아서 놓은 뒤 시체만 가져갈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8절 보시면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여자들의 말을 믿었으니 칭찬 받을 일인가요? 이것은 말씀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받아들인 것이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말씀이 아닌, ‘몸이 연기처럼 빠져나가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셨나보다’라고 눈으로 판단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감각에 의존된 믿음입니다. 감각에 의존된 믿음이 왜 문제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처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살아나신 무덤에서 예수님을 두른 세마포와 얼굴 수건을 본다면 믿음이 확실해질는지 모르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믿지 못하면 우리는 감각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눈을 띄워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는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 후 따로 만나셨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글로바와 그와 함께 있던 제자인데, 아마도 그의 아내로 추정됩니다. 누가복음 24장 22절부터 24절에 글로바와 그의 아내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눅 24:22-24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자들이 천사의 말을 들었고, 제자들이 직접 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 25절부터 27절에 말씀하십니다.
눅 24:25-27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미련한 자’란 세상에서 말하는 똑똑한가 어리석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감각을 통해 행하는 모든 결정과 판단이 미련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지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운영하시며 우리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들이는 눈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에 대해 이미 써있는데 왜 받아들이지 못하나요?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이 미련함이 예수님의 부활로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는 다들 성경을 안다고 생각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얘기를 들어도 믿지 못하는 순간, 이들이 감각이 매인 자들이며 미련한 자들임이 폭로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부활을 믿고 계신가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죽음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유의 길이라는 사실과, 이 땅에서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나의 죽음도 나에게 유익이며 그것이 새로운 부활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이것을 믿는다면 이 땅의 삶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 대한 집착과 의존을 내려놓으며 하나님 나라를 더 사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부활을 믿지 못해서 감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생각이 이 땅의 것에만 집중하고 계시다면, 미련한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아름다운 것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그 때 이 땅의 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세계가 여러분을 가득 채워 이 땅의 일시적이고 허무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